<후불제 민주주의> - by 유시민
왜 우리는 지금 다시 헌법을 읽어야 할까
대한민국 헌법이 그리고 있는 인간과
세계는 어떤 것인가
대한민국은 진짜로 민주공화국이며
주권은 진짜로 국민으로부터 나올까?
1부 헌법의 당위
행복
나는 왜 태어났고 무엇을 위해 사는가?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인생인가?
혹시 내가 그 어떤 목적에 쓰이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 목적은 도대체
무엇이라는 것일까?
어린 시절부터 수도 없이 스스로에게
던졌던, 존재의 이유 또는 삶의 목적에
관한 질문이다.
나는 이런 의문을 떠올린 사람이
나 혼자일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구도 마음에 와 닿는
대답을 주지 않았다.
어떤 책에서도 시원한 답을 찾지 못했다.
많은 세월이 흘러 나도 어느덧 나이
50줄에 들어섰다.
세파에 흔들리며 인생의 단맛과
쓴맛을 보는 동안, 나는 이 질문을
거의 잊어버렸다.
돌이켜보면 서른 넘은 후로는
그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않았고,
내게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도
없었던 것 같다.
하기야 그 나이에 이런 실존적 고민을
토로했다면 철이 덜 난 사람 취급을 받았을지 모른다.
존재의 이유나 삶의 목적에 관해 한번쯤
자문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데 또 많은 사람들이 그런 물을 자체를
잊어버린 채 오늘을 살아간다.
그 의문이 다시 찾아왔다.
너는 왜 사느냐?
네가 추구하는 삶의 목표는 무엇이냐?
아직 남은 삶이 너무 길기에 대답을 찾아야 한다.
통계청의 인구 추계에 따르면 큰 병 없이
마흔 살이 된 사람이라면, 통계청의 인구
추계에 따르면 큰 병 없이 마흔 살이 된
사람이라면, 예기치 못한 불행이 덮치지 않는 한,
여든까지는 살 것이라고 한다.
나도 앞으로 30년은 더 살 것이다.
이미 중년이나 노년에 접어든 사람도
남은 인생을 위한 지향과 좌표가 있어야 한다.
나도 그렇다.
인생의 목표 또는 삶의 목적에 대해 사람마다
다른 대답을 내놓을 것이다.
억만장자와 가난한 청년의 대답이 같기는 어렵다.
무신론자와 성직자, 철학자와 생물학자,
대기업 경영자와 노동자의 대답도 서로
다를 것이며, 어느 것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적지 않은 책을 읽고 많은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눈이 번쩍 뜨이는 좋은 답을
찾으려고 애썼다.
그런데 상상하지 못했던 엉뚱한 곳에서
다른 무엇보다도 더 깊이 내 마음에
와 닿는 소리를 찾았다.
그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평범하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부터 거기 있었으며,
사실 누구나 알고 있는 대답이기도 하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이것은 이른바 행복추구권을 명시한,
대한민국 헌법 제10조이다.
일제 강점기 <폐허>동인으로 활동했고
빅토르 워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을 최초로
번역해 소개했던 소설가 민태원 선생은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라며
청춘을 예찬했다.
선생께는 미안하지만, 나는 <청춘예찬>이
아니라 대한민국 헌법 제10조를 읽을 때
가슴이 설렌다.
괴롭지 않은 청춘이 어디 있으랴만
조금은 별나게 괴로운 청춘을 보내서 그런가.
<청춘예찬>도 설레게 하지 못했던 내 가슴을
겉모양은 영어 번역문처럼 못나 빠진 헌법
제10조가 두근거리게 만든다.
그렇다. 나는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지닌
존엄하고 가치 있는 인간이다.
대한민국 최고 규범인 헌법이 내가
그런 존재임을 보증하고 있다.
나는 왜 태어났고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헌법은 이렇게 대답한다.
-당신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태어났으며,
당신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삶을
살기 위해 존재합니다. 당신이 재벌 회장의
운 좋은 상속자로 태어났든, 아니면 일하고
또 일해도 끝없이 가난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딸 아들로 세상에 나왔든, 국가는 행복을
추구할 당신의 권리를 인정합니다.
당신이 빼어난 재능을 지닌 사람이든,
아니면 남들만큼의 평범한 재능만
가진 사람이든 상관없이, 국가는
당신이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장합니다.
당신이 여자든 남자든, 당신이 키가 크든
키가 작든. 당신이 힘이 세든 힘이 약하든.
국가는 당신이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존중합니다.
당신은 그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으며
그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국가가 존재합니다.
당신이 국가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당신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나는 행복하게 살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나의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부모형제도 배우자도 헌법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
행복한 삶은 나 스스로, 나 나름대로 만드는 것이다.
국가가 보장하는 것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이지
행복 그 자체는 아니다.
행복한 인생은 어떤 인생인가.
평생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 일을 남들보자 잘하면서, 그리고 그 일로
돈을 벌어 가족과 함께 먹고사는 인생.
이런 인생이 행복한 인생.
성공하는 삶이 아닐까 싶다.
높은 지위나 많은 재산이 반드시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삶을 설계할때 널리 퍼진 고정관념을
무작정 추종하거나 남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할 필요는 없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스스로 느끼는
행복의 밀도와 지속 가능성이다.
가치판단의 무게중심을 타인의 평가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두는 사람만이
농밀한 행복감을 지속적으로 맛볼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쓰고 싶은 글을 쓸 때
나는 하루하루가 행복하다.
내면이 충만해지고 삶이 온전해지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이 일만큼은 어느 누구한테도 크게 뒤지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더 행복하다.
풍족하지는 않아도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살면서 가끔씩은 주변을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돈을 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만큼 행복할 것이다.
이것은 나의, 나만의 행복이다.
다른 사람은 나와는 다른 일을 하면서
이런 행복을 얻을 것이다.
나는 대한민국이 언제나 사람들이 각자
자기가 원하는 삶을 추구할 자유와 권리를
인정하고 보장해주는 나라이기를 바란다.
사실 대한민국은 어느 정도 그런 나가 되었다.
나는 늦게 태어난 것을 큰 행운으로 여긴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살았던 세상에는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장하는 국가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헌법 제10조가 내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은 그것이 내 존재의
이유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말은 도대체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을까?
대한민국 헌법에 그것을 적어 넣은
고마운 이는 누구였을까?
그 주인공은 놀랍게도, 나를 포함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청년들에게 괴롭기
짝이 없는 청춘을 선사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자기 자신의 이익과 국민의 이익을
구별할 줄 몰랐던 사람.
그래서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국민을 학살하면서
권력을 움켜쥐었던 사람. 대통령이 뇌물을 받지 않으면
기업인들이 불안해져서 투자가 위축되고 국가경제가
멍든다는 애국적 소신에 따라 천문학적 규모의
뇌물을 받았던 사람. 29만 원에 불과한 재산을
가지고도 품격 있는 노후생활을 즐기는 현대판 이적의 주인공.
이름을 대지 않아도 누구나 아는 바로 그 사람이
제5공화국 헌법 초안 작성에 협력한 어떤 헌법학자의
주장을 받아들여 1981년 여덟번째로 헌법을 개정하면서
행복추구권 조항을 넣었다.
그림자는 빛의 존재 증명이고 빛은 그림자의 존재 조건이다.
빛이 없으면 그림자도 없다. 만사에는 다 명암이 있기 마련이다.
오로지 좋기만 한 것이 세상 어디에 있으랴.
사람도 그렇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약한 곳이 있다.
완벽한 인격자처럼 보이는 사람도 알고 보면
크고 작은 결점이 있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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