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 by 김경민 , 정세권


365일 책을 소개하는

Stories Book입니다.


오늘 소개드릴 책은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라는

역사/한국사 도서입니다.


식민지 경성을 뒤바꾼 

디벨로퍼 정세권의 시대


일본인의 북촌 진출을 막아야 한다.


20세기 초 경성에서 펼쳐진

부동산 개발의 뜨거운 역사



서울의 오래된 기억, 북촌, 익선동 한옥마을은

경성의 뉴타운이었다.


경성 전역에 한옥 대단지를 건설한

조선 최초의 디벨로퍼 

정세권의 개발시대



프롤로그


많은 사람들이 북촌에 열광하고 있지만,

정작 누가 이런 동네를 만들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비단 북촌만이 아니라

인근의 인사동, 혜화동, 성북동의 작은

한옥들, 그리고 서서히 빛을 내고 있는

종로 3가 뒤편의 익선동, 종묘 옆 봉익동 등

2000년대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 아담한 동네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20세기 초 한명의 선각자와 그가 설립한

회사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그는 경성 전역에 작은 한옥들이 옹기종기

모인 한옥집단지구를 건설했다. 조선인을

위한 주택을 조선인 회사가 건설해 

조선인들이 살게 한 것이다.


1920년대 일제가 계획적으로 북촌

진출을 시도하면서 조선인들의 주거

공간을 위협할 때, 그의 대규모 

한옥집단지구 개발은 조선인이 살 수 

있는 집을 지어 조선인들의 주거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는 주택 부문의 물산장려 운동이었고,

이를 통해 조선인의 북촌이 건재할 수 있었다.

물촌 북촌 전체, 또는 인사동과 혜화동,

성북동 전체를 그가 개발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북촌의 가회동 31번지를 비롯해

비교적 큰 면적이 그에 의해 개발되었다.


그러나 그는 집장사로 불렸고, 그의 한옥들은

20세기 후반까지 대중의 관심 밖에 

머물렀으며 헐려야 할 대상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가 개발한 가회동

31번지는 전 국민, 아니 세계인들이 서울에

오면 들르는 명소가 되었다.


그에 대해 춘원 이광수가 남기 기록을

살펴보자. 타지에서 귀국한 이광수는 

경성 정착 초기에 거주할 집을 찾이

못해 힘들어했다. 이때 춘원을

도와준 이가 그였으며, 추후 이광수는 

그가 지어 준 주택 완성을 기념하여

성조기라는 글을 썼다.


나(이광수)는 그의 소유인 가회동 

기옥을 전세로 빌어서 3, 4개월 살았지만,

그가 어떠한 인물인 줄을 잘 몰랐다.

다만 가끔 그가 토목 두루마기를 입고

의복도 모두 조선산으로 지어 입고 다니는

것과 머리를 바짝 깎고, 좀 검고 뚱뚱한 영남

사투리를 쓰고 말이 적은 사람인 것만 보았었다.


조선물산장려를 몸소 실행할뿐더러 장산사라는

조선물산을 판매하는 상점을 탑골공원 뒤에 두고

조선산 의복과 양복을 장려하고 실생활이라는

잡지를 발행하여 조선물산장려를 선전하는

인문인 줄을 알았다.


조선식 가옥의 개량을 위하야 항상 연구하여 

이익보다도 이 점에 더 힘을 쓰는 희한한

사람인 줄도 알았다.


기타 설계, 변소, 마루, 토역재료 등

내가 안 것만 하여도 정 씨의 개량한 점이

실로 적지 아니하다. 미닫이 밑에 굳은

목재를 붙이는 것도 아마 씨의 창의

라고 믿는다. 나는 더욱 정 씨의 인격을

존경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한 사람의 인격의 힘이 이처럼 영향이

큰가를 느꼈다. 이것도 내 집 성조에서

얻은 큰 소득 중에 하나다.


이광수의 부인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인

허영숙은 1930년대 효자동 175번지에

허영숙 산원이라는 병원을 열었는데,

이 병원 역시 그가 지었다고 한다.


그는 한옥만 건설한 것이 아니다.

H.D. 아펜젤러와의 친분으로

배재학당 강당도 건설했다.


그는 성공한 부동산 디벨로퍼이자 

대자본가에 그치지 않았다.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를 후원하고

조선물산장려회의 실질적 성공을 이끌었다.


본인의 건물에 조선물산장려회 사무실과

전시관을 개설해 조선물산장려운동의 

황금기를 열었고, 이후 조선어학회에도 

회관과 토지를 기증하며 조선어사전 발간에

깊숙이 개입했다. 일제는 그의 민족주의 운동을

빌미 삼아 고문을 가하고 재산을 강탈했다.


그리고 그의 부는 시간과 함께 소멸되었고,

그에 대한 기억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19세기 중반, 파리는 매우 낡고 더럽고 좁은

골목이 있는 도시였다. 당시 파리 시장 오스만은

파리를 대로가 가로지르고 거대한 랜드마크

건물이 우뚝 서 있는 지금의 모습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는 무려 20년에 걸쳐 파리를 개조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많은 부작용이 따랐다.

파리를 불도저로 밀어 버려 서민 주거 

지역들이 파괴되었고 이로 인해 

서민주택 임대료가 폭등하는 등 각종

사회문제가 발생했다. 그러나 우중충한

모습의 산업도시를 아름답게 변모시켰고, 파리는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유럽 및 미국 도시들은 파리를 닮고자 하고,

지금의 파리 모습을 만들어 낸 오스만은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북촌 한옥단지의 예쁜

외양을 즐길 뿐 누가, 왜, 어떻게 북촌

한옥마을을 만들었으며 우리 민족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이를 개발했던 위대한 인물이 

한국 근현대사에 어떤 족적을 남겼는지를

기억하지 못한다. 자수성가한 이 대자본가는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할 방안을 잠시 

접어 둔 채, 돈 없는 서민들에게 

할부와 월부 등 다양한 금융상품을 제공해

서민들이 집을 살 수 있는 기회도 제공했다.


오스만처럼 파리를 대대적으로 개조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회사는 한때 경성의 1년치 

주택 공급의 상당 부분을 담당할 정도로

대단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에 대해 알지 못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지역을 만든 인물과 그

인물의 역사적 업적이 망각되어 있다. 이 책은

20세기 초 경성을 만든 인물 

건축왕 정세권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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