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한국현대사 > - by 유시민

1959-2014, 55년의 기록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체험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마주친

현대사의 민낯, 우리 시대 고통의

역사적 경험을 저자의 개인적 체험과

개성으로 길어 올린 참신한 역사교양서




1959년 돼지띠


1959년의 대한민국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꼭 누가

잘못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광복 14년,

정부 수립 11년, 한국전쟁의 포화가 멈춘

지 겨우 6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7년 전 인 1997년에 우리는 

IMF 경제위기를 겪고 있었다.


11년 전에 노무현 대통령이, 6년 전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했다.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대통령의 말과 행동은

아직 망각의 축복을 받지 못했다.


IMF 경제신탁통치나 명박산성,

전직 대통령의 죽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던 일제의

억압과 착취, 해방공간의 혼란,

한국전쟁은 여전히 피가 철철

흐르는 상처로 남아 있었다.




대한민국은 학대와 굶주림, 질병으로

숨이 넘어가는 어린아이와 같았으며

공식적으로는 국제연합UN, 실제적

으로는 미국이라는 이웃이 그 아이를

구해주었다. 미국은 대한민국의 출생과

성장을 도운 양아버지와 같았다.


우리는 미군정의 감독과 보호를 받으면서

정부를 세웠으며 미군은 북한의 침공을

받아 사경을 헤매는 대한민국을 구해주었다.

우리는 미국의 후견과 지원을 받으면서

산업화를 이루었다. 미국을 위해 아무

원한도 없는 베트남에 대규모 전투부대를

보냈으며 부시 대통령의 명분 없는

이라크전쟁 파병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다.


미군은 60년 넘게 수도 서울 한복판에

사령부를 두고 있다. 좋은 양아버지였든

아니든, 미국이 양아버지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의 내전인 동시에 동서냉전의

개막을 알린 국제전이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50년

6월 25일 대한민국을 침략했다.

북한은 중화인민공화국 마오쩌둥

주석의 동의를 받고 소련 스탈린

수장의 지원을 받으며 전쟁을 시작했다.


미국이 참전 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

김일성은 한 달 안에 통일전쟁을 끝낼

심산이었다. 그러나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이 인민군의 총공세를 죽기살기로

막아내는 동안 유엔군이 상륙했다.

ㅈ너

인민군이 압록강까지 밀려났을 때

중국인민지원군이 들어왔다. 결국

1953년 7월, 유엔군과 조선인민군,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들이 전쟁의

승패를 가르지 못한 채 군사정전협정에

조인했다.


일시적이고 불완전하다고 할지라도 평화는

좋은 것이다. 전쟁의 포연이 멈추자 사람들은

생기는 대로 아기를 낳았다. 100만여 명의

59년 돼지띠들은 이른바 전후 베이비붐

한가운데에 태어났으며, 현대사의 격량을

헤치며 저마다의 인생 스토리를 썼다.


나는 출생신고도 하기 전에 질병으로 죽는

불운을 피했다. 살면서 산업재해나 교통사고를

당하지도 않았다. 좋은 부모를 만나 제대로

공부할 수 있었으며 내 신념과 가치관에

따라 소신껏 살았다. 나는 동갑내기 가운데

첫 번째로 대한민국 국무위원이 되었다.


참여정부 첫 내각의 행정자치부장관이었던

김두관 씨는 호적상 동갑이지만 실제로는

한 살이 많다. 그래서 사석에서나 공석에서나

그를 형님으로 대했다. 나는 운이 매우

좋은 59년 돼지띠 남자였다.


평등하게 가난했던 독재국가


1959년 대한민국 인구는 2,400만 명이었다.

해마다 100만 명씩 아기가 태어나

인구증가율이 3퍼센트가 넘었다.

경제활동 인구는 760만 명이었다.


미성년자가 많고 여성들이 가정에

머물렀기 때문에 경제 활동 참가율이

30퍼센트밖에 되지 않았다. 공식

실업률은 7퍼센트, 실업자 수는

50만 명 정도였다. 취업자의 63퍼센트가

농사를 짓거나 물고기를 잡으며 살았다.


광산이나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8.7퍼센트, 건설업 종사자는 2.5퍼센트에

불과했다. 공무원과 공공기관 임직원을

포함한 공공서비스와 민간서비스업

종사자가 28.3퍼센트였다.

국민 3분의 2가 농어민과

그 가족이었던 셈이다.


국민들은 평등하게 가난했다. 1959년

국내총생산GDP는 19억 달러,

1인당 GDP는 81달러 수준으로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우간다, 토고와

함께 국가 순위 밑바닥에 있었다.


필리핀과 태국, 터키는 우리의 두 배가

훨씬 넘었다. 유럽 선진국들은 1,000달러,

미국은 2,000달러를 웃돌았다. 대한민국은

국내총생산의 10퍼센트나 되는 2억 달러의

해외원조를 받으면서 전쟁고아를 돌볼

능력이 없어 대거 유럽과 미국에 입양시켰다.


GDP가 물질적 생활수준을 정확하게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비공식 거래와 

자급자족 경제 활동은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세계 최빈국 대열에

있었다는 것은 다툴 여지가 없다.


1959년의 대한민국은 무엇보다도 먼저

가난한 나라였다. 돈이 많다고 해서

훌륭한 인생을 사는 건 아니다. 그러나

세 끼 밥도 제때 먹지 못한다면

훌륭한 인생이나 품격 있는 삶은

생각조차 하기 어렵다.


주택은 대부분 초가집이었으며, 도시에서도

그나마 조금 넉넉한 사람들이 기와집에

살았다. 양옥은 희귀했고 아파트는 전국

어디에도 없었다. 사람들은 숯과 나무를

때서 물을 끓이고 밥을 짓고 방을 데웠다.


조선 후기부터 망가지기 시작한 삼천리

금수강산은 일제의 수탈과 한국전쟁으로

초토화되었다. 사람의 발길이 쉽게 닿는

곳은 나무 한 그루 없는 민둥산이었다.

전기는 도시 일부 지역에만 들어왔으며

상수도와 하수도가 거의 없었다.


이상 < 나의 한국현대사 >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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