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선의 현대사 > - by 김은식

대권을 향한, 대한민국을

뒤바꾼 이미지 커뮤니케이션의 실체

대한민국 대선의 흐름과

민주주의를 다시 읽다

< 대선의 현대사 >




표심은 어디로 어떻게 흔들려왔을까

그리고 우리는 어디로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 대선의 현대사>

정치인의 이야기, 국민의 이야기


한국 남성의 90%는 축구 국가대표팀 전술에

관한 전문가이며, 한국인의 90%는 정치

전문가라는 말이 있다. 한국 사람들은 참

정치에 관심이 많다. 물론 여론조사를 할

때마다 40% 안팎의 사람들이 정치무관심층

으로 집계되기는 하지만, 사실 그마저도 조금

파고들어 따져보면 정치 문제에 왜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모르겠다 는 쪽보다는 정치

문제에 정나미가 떨어져서 더 이상 관심

가지기 싫다는 쪽에 가깝다.


정치혐오라는 설명이 더 정확한 그 정서

역시 정치에 대한 깊은 관심의 이면이라

는 점에서 흔히 말하는 모든 것이 풍족해

서 무료하다는 북유럽 어느 나라 청넌들의

정치무관심과는 색깔이 많이 다르다.




정치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특정한

정치인이나 정치세력에 대해 동일시

하는 정서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생각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래서 늘 서로 논쟁하고 갈등하는

일에 끼어들게 됨을 뜻한다.


정치인이나 정치세력이란 서로 차별화

하고 갈등하고 투쟁하는 것이 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정치를

업으로 삼거나, 정치에 관심을 가지거나,

그 과정을 연구하는 모든 이들이 공통으로

안고 사는 질문이 있다.


바로 왜 우리나라의 정치는 늘 이 모양

이 꼴인가? 혹은 왜 나라꼴이 이 모양인가?

하는 것이다. 물론 민주주의 국가에서

나라꼴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국민이다.


나라꼴이란 결국 정치인들이 권력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린 것이며, 어떤 정치인에게

권력을 쥐여줄 것인가는 국민이 결정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국민이 자유롭게 한

표씩을 던져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뽑는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역시 민주주의 제도에 의해

굴러가는 나라임은 분명하다.


물론 여전히 심심치 않게 우습고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지기는 하지만,

다수의 국민에 의해 선택된 정치인이 권력을

쥐게 된다는 점은 누구도 부정할 수가 없다.


끝내 응징되지 않는 반칙에 의해 크고 작은

왜곡이 발생해왔고, 또 앞으로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은 외면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최종 결정자가 국민 자신이

라는 사실을 국민 자신이 인정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정치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짜증스러워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단지 누군가에게 책임을 지우고 비판하기만

하면 되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감정은 짜증이

아니라 분노다. 짜증이란 화가 일어나되,

방향을 찾지 못해 내 안에서 폭발할 때

느끼는 것이다. 누구의 탓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렇다고 덮어놓고 반성을 해야

할 것 같지도 않은 상황에서 느끼는 것이다.


원론적으로 생각하자면 지금의 나라꼴에

대해 최종적인 책임을 져야 할 것이 바로

국민으로서의 우리 자신들이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무릎 꿇고 내 탓이오를 외치기엔

뭔가 억울하고 허전하다는 얘기다.


도대체 무엇이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사실 대중이 정치인에 대해 아는 것은

많지 않다. 언론에 보도되는 것은 매우

부분적이고, 여러 방향으로 굽어 있으며,

그나마 쉽게 기억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대중이 가진 것은 정치인들에 대한

몇 개의 이미지들이다.


물론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정치인들에게 좋은 그림을 만들어내

는 일은 오래전부터 정책을 만들어내

는 일보다도 훨씬 중요하게 받아들여

져 왔다. 그래서 그들은 천진난만한

아이를 안거나 그 아이의 볼에 뽀뽀

하거나 손가락을 들어 그 아이에게 저

멀리 어딘가를 가르키는 사진들 만들어낸다.



또 겨울이면 두 볼에 검대을 묻힌 채 연탄을

나르기도 하고, 보육원이나 양로원 정문 앞에

라면 박스를 쌓아놓은 채 웃는 사진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정성껏 만들어낸

이미지를 대중의 마음에 심기는 쉽지가 않다.


우선 그것은 모든 경쟁자가 다 하는 일이기

때문이고, 또 무엇보다도 작위적은 느낌은

어쩔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래 남고

강하게 남는 기억은 우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이미지 들이다. 돌발적인 상황에서 흘린 눈믈,

엉걸겹에 흘린 감탄사나 비명, 혹은 예상 밖의

위기상황에서 했던 반사적인 행동들.


예컨대 장인의 과거 좌익 행정 의혹에 대해

추궁하는 기자들을 향해 그럼 아내를 버리

라는 거냐고 답했던 노무현의 모습, 혹은

커터칼 테러 피습을 당해 응급수술을 받은

뒤 몰려든 당직자들에게 제일 먼저 대전은요?

라는 질문을 던졌다는 박근혜의 모습은 얼마나

강력하게 우리의 머리와 가슴에 남아있는가.


그런 이미지들이 하나의 내러티브를 이룬

다면 대중은 더더욱 확신한다. 그리고 그런

확신은 좀처럼 깨지지 않는다. 하나의 점은

방향이 없지만 두 개의 점은 선을 이루고,

최소한 이쪽 아니면 저쪽을 가리키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선 위에 두세 개의

점이 더 놓인다면, 그 사이의 빈 공간을

저마다의 상상이 곧 빼곡히 채우게 되고,

어지간한 반례로도 무너뜨릴 수 없는

강한 확신으로 발전한다.


몇몇 정치인의 지지자들이 꼭 그래야

하는 이해관계로 엮인 것이 아니면서

도 마치 오랜 세월 일거수일투족을

곁에서 보아온 것과도 같은 친밀함과

신뢰감을 느끼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확신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믿음이 타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예컨대 대전은요? 라는 박근혜의

일성은 삼십여 년 전 그녀가 아버지

박정희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었을

때 제일 먼저 전방은요? 라고 묻더라는

이야기, 그리고 몸담고 있던 한나라당이

대기업들로부터 차떼기 방식으로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일이 들통나 궤멸의

위기에 처했을 때 당사를 팔고 천막

당사에 앉아 선거를 지휘했던 일과

이어지면서 위기상황에 강하다는

신화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하고 그 배에 타고 있던 300명

이 넘는 학생들이 물속으로 잠겨가던

7시간여 동안 청와대의 집무실도 아닌

관저에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방식

으로 시간을 허비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일들이 뒤늦게 알려졌을 때 그

신화의 허망함에 대해 모든 국민들이

뼈저리게 깨우쳐야 했다.


이상 < 대선의 현대사 >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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