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한 이타주의자> - by 윌리엄 맥어스킬


세상을 바꾸는 건 열정이 아니라 냉정이다


선의와 열정에만 이끌려 무턱대고 실천하는

경솔한 이타주의의 불편한 진실



착한 소비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차라리 노동착취 공장 제품을 사라


당신은 번화가를 걷고 있다.

젊고 매력적인 여성이 부담스러울 만큼

열정적인 태도로 길을 막아서며 대뜸 말을 건다.


태블릿을 든 그녀는 눈부신 화장품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있다. 당신이 걸음을 멈추자

그녀는 눈부신 화장품에서 투자자를 찾고 있다고

말하며 화장품 시장 규모가 얼마나 거대한지,

자사 제품이 얼마나 뛰어난지 줄줄 늘어놓는다.


게다가 눈부신 화장품은 자금의 90퍼센트를

제품생산에 투입하고 임금, 유통, 마케팅에는

10퍼센트도 쓰지 않는데도 매우 효율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므로 높은 투자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당신이라면 이 화장품 회사에 투자하겠는가?

물론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혹시라도 구미가 당긴다면 전문가와 상담을

하거나 동종업체를 조사해 눈부신 화장품의

실적을 따져 볼 것이다.


투자한 돈으로 최고의 이익을 거둘 수 있다는

확실한 증거도 없이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남의 말만 믿고 선뜻 돈을 내는 멍청한 짓을

하진 않을 거라는 말이다.


화장품 회사가 길거리에서 투자자를 모집하는 일이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런대 해마다 수십만 명이 잘 알지도 못하는

모금 담당자의 말만 믿고 들어본 적도 없는

자선단체에 기부한다. 그럴진대 그 돈이 어떻게

쓰이는지는 알 턱이 없다.


부실기업에 투자하면 사업 실패에 따른 비용

손실이라도 눈에 띄게 마련이다.

그런데 부실 자선단체에 투자하면 실패 여부를

알 길이 없다. 실크 셔츠라고 광고하는 제품을

구입했는데 물건을 받고 보니 폴리에스터 셔츠라면

단박에 알 것이다.


그런데 공정무역 스탬프가 찍힌 커피를 구입했다면?

그게 세상에 도움이 되는지, 해악을 끼치는지,

이도저도 아닌지 영 알 수 없다.


적절한 피드백이 없는 상태에서는 당신의 이타적인

행위가 실제로 남한테 득이 되는지 실이 되는지

명확하게 알기 어렵다.


우리는 남을 도우려 할 때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무턱대고 행동으로 옮기곤 한다.

숫자와 이성을 들이대면 선행의 본질이 흐려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탓에 세상에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기회도 놓치고 만다. 이 책은 우리의 선행이

이 처럼 선의에만 의존하면 오히려 해악을

끼칠 수 있으며,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냉정한

판단이 앞설 때라야 비로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일깨워 준다.


머리말


식수 공급과 해충구제

빈곤층의 삶을 개선시키는 선행은 무엇일까?


남아프리카인 트레버 필드는 갓 구운 스테이크와

차가운 맥주를 좋아하고 친구들과 낚시를 즐기는

지극히 평범한 중년 남자였다.


톱카, 펜트하우스와 같은 대중잡지에 광고를

싣는 광고기획자였지만 남을 돕는 데 자신의

직업적 재능을 써야겠다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다 1989년, 플레이펌프를

만난 뒤 그의 인생은 백팔십도 바뀌었다.


그해 필드는 장인과 함께 남아프리카 행정수도

프리토리아에서 열린 농업박람회에 갔다가 특이한

급수펌프를 발견했다.


로니 스투이버라는 엔지니어가 출품한 신형

급수펌프를 보자 필드는 수년 전 낚시여행에서

마주친 풍경이 문득 떠올랐다.


풍력발전 급수펌프 옆에서 몇 시간씩 기다리던

시골 아낙들, 물을 길으러 수 킬로미터를 힘겹게

걸어왔지만 그날따라 바람 한 점 불지 않아 아낙들은

펌프 주변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필드는 생각했다.


분명히 더 좋은 방법이 있을 텐데 그러던

차에 뜻밖에도 농업박람회장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은 것이다.


번뜩이는 아이디어였다.


스투이버가 개발한 펌프는 가난한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동펌프나 풍력펌프와는 달랐다.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빙글빙글 돌리면서 노는

회전 놀이기구인 일명 뺑뺑이와 펌프 기능을

결합시켜 아이들이 기구를 돌릴 때 발생하는

회전력으로 지하수를 물탱크까지 끌어 올리는 원리였다.


이제 시골 아낙들이 수킬로미터를 걸어와 힘들게

펌프질을 하거나 바람이 불 때까지 마냥 기다리며

풍력펌프 앞에서 줄을 설 필요가 없었다.


플레이펌프는 이름 그대로 아이들이 놀 때

발생하는 힘을 이용해 마을에 안정적으로

물을 공급하는 장치였다.


필드는 당시를 회상하며 아프리카 아이들은

할 일이 거의 없어요. 놀이터에 이렇다 할

놀이기구도 없고 책도 부족한 형편이죠.

그런데 물을 긷는 건 어느 집에서나 큰 문제거든요.

플레이펌프를 보는 순간 이만한 아이디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고 말했다.


필드는 스투이버의 특허를 사들여 5년 동안

틈틈이 설계를 개량했다.


광고기획자로 일한 경험을 살려 물탱크 좌우에

옥외 광고판을 달아 펌프 유지보수 자금을

충당한다는 사업계획도 세웠다.


1955년에는 콜게이트 파몰리브를 첫 광고주로

확보해 플레이펌프 1호를 설치했고, 직장을 그만둔

뒤에는 플레이펌프스인터내셔널의 전신이 된

자선단체를 설립해 본격적으로 펌프 보급에 나섰다.


초기 반응은 시원찮았지만 필드는 뜻을 꺾지 않았다.


사비를 들여 펌프 몇 대를 더 설치하는 한편

사업비를 조달하기 위해 남아프리카 전역을

돌며 기업 및 지방자치단체와 교섭을 이어 나갔다.


그 덕에 2000년대로 접어들 무렵엔 50대의

플레이펌프가 전국에 설치됐다.


그러던 중 3000명의 지원자를 제치고 세계은행

시장개척상의 수상자로 뽑히는 쾌거를 거뒀다.


효과 측정 및 복제가 가능하며 개발 효과의

잠재력도 풍부한, 초기 단계의 혁신적인 개발

프로젝트에 수여되는 상이었다.


이를 계기로 첫 번째 돌파구가 열렸다.

수상 이후 지원금이 몰려들었고

플레이펌프에 관심이 집중됐다.


당시 미 인터넷 기업 AOL의 최고경영자

CEO였던 스티브 케이스도 아내 진을

동반하고 현장을 찾았다.


케이스 부부는 플레이펌프를 경탄할 만한

아이디어라고 평가했습니다.


펌프가 작동하는 걸 보자마자 마음을 빼앗겼죠.


2005년 케이스 부부는 프로젝트에 자금을 대고

필드와 협력해 플레이펌프스인터내셔널의 미국

지부를 설립하기로 했다.


아프리카 전역에 플레이펌프 수천 대를

설치하겠다는 게 이들의 공동 목표였다.


플레이펌프는 대규모 마케팅 캠페인의 중심에 있었다.

케이스는 AOL 경영 경험을 살려 새로운 형태의

온라인 모금 활동을 벌였고, 영국의 모금단체인

원재단은 원 워터라는 생수 브랜드를 출시해

판매 수익을 플레이펌프스인터내셔널에 기부했다.


생수 사업은 큰 성공을 거뒀고, 원 워터는

2005년 G8 정상회담에 앞서 열린 자선콘서트

라이브 8와 가난을 역사 속으로 캠페인의

공식 생수로 채택되었다.


전 세계의 언론도 재치 있는 말장난을 발휘할

기회를 놓칠세라 놀면서 물 긷기,

마법의 뺑뺑이와 같은 표제의 기사를 쏟아냈다.


이상 <냉정한 이타주의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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