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 by 공지영


명불허전 공지영 저자의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어쨌든 한

인간이 성장해가는 것은 운명이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끊임없는 통찰과 반성

실험정신과 문학미학의 결정체로 빛나는

공지영 소설





이상문학상, 한국소설문학상,

21세기문학상 수상작 수록


당신이 홀로,  이 책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좋겠습니다. 이 글을 읽는

동안 당신의 가슴속으로 희다흰 매화가

푸르르, 푸르르 떨어져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내가 아픈 것을 당신이 아파하고

당신의 아픔이 미세한 바람결에 내게로 전해져.

아마도 펼쳐진 책장 앞에 모두가 홀로일지라도

우리는 함께 따스할 것 이니까요.

- 작가 후기 중에서


작가의 후기부터 읽어 봤는데

말 하나하나가 따뜻하고 전반적인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이제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의

내용을 확인하겠습니다.




월춘 장구


나의 정원


정원은 텅 비어 있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써야 할 글에 대한 두통과 읽어야 할 책

몇 권 그리고 향기로운 커피를 보온병에

넣어가지고 달려간 나의 시골집 정원은

텅 비어 있었다. 천지에 붉고 노랗고 흰,

꽃이란 꽃들은 다 피어나고, 피어나다

못해 벚꽃 잎 진 자리엔 저도 꽃이라는

듯 삐죽이며 연녹색 잎들 돋아난 길을

달려왔는데, 나의 정원에는 그 어떤

파릇한 것도 돋아나지 않고 그저 황량한

겨울만 가득 차 있었다. 해발 800미터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리라, 생각해보았지만

마음은 몹시 서운했다.


세상처럼 다채롭지는 않아도 그래도 어느 정도

그러니까 하다못해 진달래 개나리 정도는

피어 있을 거라 기대했었는데 언제나처럼

터무니없는 기대가 영락없이 배반당하는 걸

나는 느꼈다. 눈 부릅뜨고 둘러보아도 파릇한

기미 하나 없는 누런 정원 위로 찬바람이

부는데 나는 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 풍경 앞에 서 있었다. 잠시 이 배반을

받아들일 시간이 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짐을 마당에

놓고 뛰어가 꽃나무들을 들여다보았다.

벚나무에는 도톰한 꽃눈이 터질 듯

매달려 있고 홍매화 끝에도 배나무 가지

끝에도 이제 곧 꽃이 되어 터져 나올

빛깔들이 연갈색 까칠한 외피 속에

맺혀 있었다. 가지를 구부려보았더니

물이 잔뜩 올라 꺾어지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휴우,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죽지 않았으면 됐어, 죽지 않았으면 꽃

피울 수 있어,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나는 집 안으로 들어가 오랜만에 청소기를

돌렸다. 집으로 침입한 노린재들이 말라죽어

까맣게 널브러져 있었다. 지난 겨울 동안

가끔씩 여기 들러 죽은 노린재들을 비로

쓸어내 었는데 대체 어느 틈으로 이렇게나

많이 또 들어온 것인지, 창문마다 테이프로

틈을 봉쇄하고 약을 뿌려댔지만 노린재들은

끝도 없이 들어와 빈집 창틀 가에 새까맣게

죽어 있곤 했다. 이것들은 어떻게 이 안에

들어왔을까, 테이프로 봉해진 창문 틈이나

집 안의 작은 틈새로 들어오기 위해 이것들

은 얼마나 애를 썼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진공청소기로 벌레들을 빨아들였다.

노린재가 풍기는 고약한 냄새가 집 안을

가득 채웠다. 아무리 막아도 아무리 싫어도

줄을 서 있었다는 듯 내 맘속으로 들어서는

고통들처럼 집 안으로 들어선 노린재는

고약한 노린내를 풍기며 청소기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죽어 있는 것은 노린재뿐은

아니었다. 몇 마리이긴 하지만 거미도 죽어

있고 가끔식 배를 드러낸 무당벌레도 보였다.


잘못된 곳으로 도망치기에는 저들이나

나나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이곳은 살자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살자리인

줄 알고 도망친 곳이 죽을 자리였고, 죽겠다고

도망친 곳이 때로는 살자리였다. 그러나 나는

오직 그 사실을 알 뿐, 그것의 법칙은 알지 못했다.

다만 살기 위해 죽을 자리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죽을 각오로 뛰어들 때만 그것이 아주

가끔 살자리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진정으로 죽을 각오로 도망칠 때는 죽을

확률이 거의 백 퍼센트이다. 그것은 목숨을

거는 일 내게는 이제 목숨을 더 걸 여력도

없어서, 생이 늘 살얼음판을 걷는 듯 버거웠다.

가끔씩 기도 중에 나는 신에게 강경한 어조로

말해왔던 것이다. 더 이상은 싫어요,

더 이상은 못해요, 더 이상 내게 나쁘게

하시면 안돼요, 당신은 정말 내게

그러면 안돼요.


청소를 마치고 싸가지고 온 커피를 따라 마셨다.

누런 정원은 아직도 겨울이었다. 그 안에서

나무들이 수액을 빨아올려 이제 곧 피어날

어떤 꽃잎을 만들고 있겠고 또 그렇게

믿고 싶지만 봄은 멀어 보였다.

나는 봄에서 겨울로, 계절을 거슬러

들어서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온 세상이 봄인데 나 혼자 여기

겨울 한복판에 앉아 있는 듯

실망스러웠고 약간은 망연했다.


지난겨울 사람의 온기 없이 혼자

겨울을 견뎌낸 이 산골집에는

여기저기 응덩이처럼 한기가

고여 있었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물구덩이에 빠진 것처럼 추웠다.

보일러를 한껏 올려놓고 옷장에서

두터운 겨울 스웨터를 꺼내 걸쳤다.

걸레를 빨다 말고 <키다리 아저씨>를

쓴 오스카 와일드를 생각했다.


키다리 아저씨네 정원에만 꽃이 피지

않았던 것은 거기가 고도가 높아서였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우리 집을 지나쳐 가던 어떤 여행객이

나중에, 사랑이 없는 저 집 주인 여자

때문에 꽃이 피지 않았다고 쓴다면 어떻게

하지, 하는 터무니 없는 생각도 스쳤다.


오스카 와일드. 들고 다니며 여러번

읽었던 그의 <옥중기>의 구절들이

떠올라왔다. 책의 첫 장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이상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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