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배우다> - by 권오상


불확실성의 시대, 우리가 알아야 할

새로운 돈의 프레임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건

최대한의 돈이 아니라 최소한의 철학이다.

현직 금융감독원 실장이자 트레이더가

알려주는 돈을 지배하는 프레임의 힘



이제껏 의존해온 사고로는

돈을 장악할 수 없다.

우리를 현혹시키는 돈의 시스템을 간파하고

돈을 바라보는 거시적 시각을 키워주는 책

99퍼센트는 부자가 될 수 없는 시대

돈과 삶의 주인이 되는 법


왜 돈을 배워야 하는가?


눈을 크게 떠

돈을 보는 시야를 넓히자

돈은 언제나 우리를 괴롭힌다.

돈 때문에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어딘가에 없지는 않을 테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 때문에 불행하다고 느낀다.


돈이 충분하지 않아서, 큰돈을 벌고 싶은데

마음대로 안 돼서, 안달이 난다.

돈이 모든 문제의 근원인 듯 생각하기 쉽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돈에는 양면성이있다.

나쁜 점도 있는 반면 좋은 점도 존재한다.

약이나 무기를 떠올리면 이해가 쉬우리라.

약은 적절히 잘 쓰면 몸에 보탬이 되지만

남용하거나 오용하면 몸에 독이 된다.

무기도 남을 해하는 데 사용될 수 있지만

반대로 나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돈도 역시 마찬가지다.


역사적으로 보면, 돈은 신분제를 무너뜨린

원동력 중의 하나였다. 신분제란 왕, 귀족, 평민,

노예 신분으로 사람들을 나누고, 이들 간에 수직적인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평생토록 주어져 있는 제도다.

그리고 신분은 대를 이어 세습되었다. 다시 말해 부모가

평민이면 자식도 평민의 삶을 살아야 했고, 부모가 노예면

자식도 노예의 삶을 살아야만 했다.


사람들의 통념과 달리 신분제는 결코 멸종된 과거의

유산이 아니다. 21세기인 현재도 세계 곳곳이 명시적

혹은 암묵적인 형태로 잔존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인도의 카스트다. 카스트라는 말의 어원은 포르투칼의

카스타로서 혈액의 순수성을 보존한다는 의미다.


성직자 계급인 브라만, 무사 계급인 크샤트리아,

평민 계급인 바이샤, 노예 계급인 수드라 그리고

노예보다도 더 천한 존재로 간주되는 하리잔으로

엄격하게 구별되어 각 신분 간의 이동이나 통혼이

허용되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가까이 가기만

해도 더렵혀진다 하여 접촉을 피한다.


2차 대전 이후 인도의 민주 정부는 공식적으로

카스트를 철폐했다. 하지만 70년 가까이 지났음에도

인도인들의 관습은 별로 바뀌지 않았다. 인도인

지인들에게 확인해본 바에 의하면 카스트에 따른

차별은 여전하다고 한다. 이름과 성을 보면 그 사람이

속한 카스트를 누구나 알 수 있어서 자신보다 낮은

카스트와 아예 대화를 피한다는 것이다.

사실 카스트는 원래 생득적 신분이 아니라 직무와

교육에 따라 생후적으로 얻는 지위였다.

그러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혈통을 강조하는

쪽으로 퇴화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혈통의 중시와 가문의 등장은 신분제라는 전근대적

제도를 만들고 싶은 이들의 전형적인 레시피다.

스스로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왕이나

귀족들에게 신분제는 맘에 쏙 드는 제도였다.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제도다 나 신분은

하늘로부터 주어진 신성한 것이다라는 말을

당당하게 내뱉었다. 오만 가지 것을 누리는

데다가 그 좋은 것을 자식들에게 그대로

물려줄 수 있으니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은 당연했다.


예를 들어, 중세 유럽에서 귀족이 누릴 수 있는

권리 중에는 초야권이라는 것이 있었다. 농노가

결혼을 하려면 신부가 영주와 첫날밤을 먼저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신부의 그러한 의무는

곧 영주의 권리였다. 나나 내 신부가 그러한 상황에

놓여있다고 생각해보라, 얼마나 부당하고 억울한 상환인지를.


사실 적지 않은 수의 역사가들은 초야권은 명목상의 권리일 뿐

실제로 행사된 사례는 거의 없었으리라는 의견을 내고 있다.

초야권은 영주가 농노들로부터 돈을 거둬들이는 구실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가령 프랑스 리비에레-부르데의 영주는

1419년 결혼하려면 6수의 돈과 돼지 반 마리, 음료수 1갤런을

바치든지, 아니면 내가 마음에 드는 경우 결혼하는 신부와

먼저 잠을 잘 수 있다고 선포했다. 이대로라면 신랑이

돈을 낼 수 없는 경우에 한해 행사할 수 있는 권리였지,

무조건적으로 혹은 영주가 임의적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그정도의 돈을 농노들이

낼 형편에 있었는지는 불문명하지만 어쨌거나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어이없고 불쾌한 신분제의

양상이었음에는 틀림없다.


쉽게 말해 신분제는 정치적 권력을 세습하기 위한 장치였다.

그리고 정치적 권력이 세습되는 곳에서 돈은 그렇게 중요한

대상이 못 되었다. 목숨이나 지위 같은 것을 자의적으로

빼앗을 수 있는 환경하에서 돈은 단지 수탈의 결과물일 뿐이었다.

신분제의 불가피함을 주장하는 사람 중에 가장 유명한 이가

플라톤이다. 그에 의하면, 개인의 정신은 욕구/영혼/이성의

3층 구조를 이루고 있기에, 사회 또한 정신의 3층 구조에

걸맞게 구성되어야 했다. 제일 하단에 욕구에 해당되는

노예나 평민들이 있고, 그 위에 영혼에 해당하는 군인들이

있으며, 제일 위에 이성에 해당하는 지배자 혹은 플라톤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철학자 왕이 있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지배자의 일은 당연하게도 모두를 지배하는

것이었다. 플라톤이 왜 그냥 왕이라고 하지 않고 철학자 왕

이라고 했는지 혹시 궁금한가? 본인의 직업이 철학자였기 때문이다.


즉 왕이 되고 싶다는 권력에의 욕구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입만 놀리는 플라톤에게 왕의 권력이 주어질 리 만무했고,

그는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다가 죽었다.

이후 플라톤은 여러 형태의 신분제를 옹호하려는 후세의

모든 기득권층이 기회 있을 때마다 입에 올리는 인물이 되었다.

최선의 지배 형태인 귀족의 지배가 허물어지면 군인의 지배,

부호의 지배, 대중의 지배, 참주의 지배의 순서로 퇴화하게

된다고 주장한 그를 현자 혹은 현인이라고 치켜세웠다.

신분상의 불평등을 인정하지 않는 민주정은 플라톤에게

거의 최악의 정치체제였다. 자신들의 억압적 지배를

합리화할 근거를 제시해주니 귀족들로서는 이보다

더 현명한 이가 있을 수 없었다. 책을 쓰고 기록을

남긴 사람들의 대부분이 귀족계급에 속했음을

생각해보면 왜 그의 이름이 지금껏 전해져

내려오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족계급의 지배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바로 돈 때문이었다. 영주의 지배로부터

도망치거나 혹은 합법적으로 돈을 지불하고 자유민의

신분을 획득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도시를 형성했다.

중세도시들은 수공업과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해나갔다.

말 타고 칼 휘두르는 것 외에 별로 할 줄 아는 게 없었던

귀족들은 점점 주도권을 상실했다. 귀족의 권력을 지배하던

토지와 토지에 부속된 농노들에게 있었는데, 자본주의가

도래하면서 토지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떨어져만 갔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농노 없는 토지만을 소유한 영국의

귀족들은 생계유지가 곤란할 정도의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돈이 신분제를 타파하는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돈 자체는 신분을 차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현대 민주주의 체제에서 내 한 표가 조선 왕조 후예의

한 표와 같은 것처럼, 평민의 1실링은 귀족의 1실링과

전적으로 동일한 1실링이었다. 누가 돈을 많이 벌 수

있느냐는 누가 더 능력이 뛰어나냐를 판단하기 위한,

완벽하지는 않지만 세습 신분에 의존하던 예전보다는

훨씬 개선된 지표였다. 한마디로 돈은 객관적이면서

동시에 평등한 매체였다. 18세기 말 쾨니히스베르크대학의

논리학 및 형이상학 교수였던 임마누엘 칸트는

너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을 언제나 목적으로

대우하도록 행위하라고 주장했다. 쉽게 말해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을 수단으로 여기지 말고

자체의 귀중한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람을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은 칸트에 의하면

옳지 못한 일이다. 하지만 사물을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까지 문제 삼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돈은 결국 도구요, 목적이 아니다.

돈이 도구라는 것을 인식하면 탐욕과 두려움이라는

감정과 결부되기 쉬운 돈에 대한 주관적 시각이 보다

객관적으로 바뀐다. 돈은 내가 살면서 추구하고자 하는

바를 이룰 수 있게 해주는 수단에 불과하다. 눈앞의 파리가

거슬려서 잡고 싶다면 한 개의 파리채로 충분하다. 파리 한 마리

잡겠다고 수십 개, 수백 개의 파리채를 탐하고 쌓고 할 필요가

없는 것과 같다. 물론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 아닌가?

하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많을수록 좋으니 우선 많이 벌고

불려야 한다는 얘기가 따라 나온다. 하지만 일단 많고 볼

일이라는 얘기는 결국 돈을 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목적으로

여긴다는 뜻과 같다. 결국 돈의 속성에 휘둘리고 지배당하게

되는 돈의 노예가 돼버리고 만다. 이래서는 돈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다.


이상 <돈을 배우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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