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 by 백영옥

아직 너무 늦지 않았을 우리에게

하는 말 내일은, 아직 아무것도

실패하지 않을 하루라고 생각하면

기쁘지 않아요? 이 전환점을 돌면 

어떤 것이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난 

그 뒤엔 가장 좋은 것이 있다고 믿고 싶어요.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시간이 우리에게 선물하는 건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똑같은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게

하는 힘 아닐까, 시간은 느리지만

결국 잎을 키우고, 꽃을 피우고,

나무를 자라게 한다. 나는 그것이

시간이 하는 일이라 믿는다.


우연을 기다리는 힘

절망에서 희망을 찾아내는

아주 특별한 능력


버킷 리스트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인생에서 버킷 리스트

같은 걸 만들지 않는 게 유일한 내

버킷 리스트라고 대답하곤 했다.


버킷 리스트를 갖지 않겠다는 건,

하고 싶은 일을 해보지 않아서

생기는 후회 없이 살겠다는 희망이었다.

사람은 해보지 못한 일에 대해 회한을

갖는다. 하지만 해본 일에 대한 후회는

비교적 짧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는 자기합리화를 하기 때문이다.




해본 일에 대해서라면, 승화라는 위대한

치유책도 있다. 고백했다가 짝사랑마저

잃은 작가가 사랑의 고통에 대한 아름

다운 연애소설을 쓴다거나, 화가나 가수가

개인적인 슬픔을 불멸의 예술로 격상

시키는 것 말이다.


빨강머리 앤을 읽은 후, 나는 줄곧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 가고 싶었다. 그곳이

비행기를 몇 번 갈아타고 가야 할

만큼 멀고, 작고, 심심한 곳이라는

얘기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가고 싶었다.

심시한 곳이란 말은 내 마음을 오히려

잡아끌었다. 내겐 심심하다는 말의

의미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심심함은 이제 내겐 인터넷 속도가 너무

느려서 스마트폰을 보지 않아도 되는

뜻밖의 세계를 뜻한다. 정신없이 흘러

가는 내 삶이 확실하게 느려지는 걸

몸으로 경험하는 일 말이다. 그건

어쩌면 초록지붕 집에 사는 빨강머리

앤의 세계로 걸어 들어가는 일처럼 보인다.


집으로 가는 사륜마차 위에서 바라본

마을의 흙이 왜 붉은지 묻는 질문에

매튜가 글쎄다라고 말하자 앤이

매튜에게 이렇게 말한다.


- 앞으로 알아낼 것이 많다는 건 참

좋은 일 같아요! 만약 이것저것 다

알고 있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그럼 상상할 일도 없잖아요.


궁금한 게 너무 많아서 빨리 어른이

되고 싶던 내게 앤의 말은 좀 처럼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며 알게 된 것들이

있다. 여러 명의 아이를 돌봐야 했던 고아

소녀는 자신이 처한 각박한 현실 속에서

가장 좋은 것을 상상하는 습관을 오래

간직해온 것이다. 그것이 삶을 대하는

앤의 태도였다.


놀아줄 또래 친구가 없어서 깨진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캐시 모리스라는 이름의

가상 친구를 만들어내는 앤, 그런 앤의

상상력이 내겐 늘 절망에서 희망을 찾아내는

특별한 능력처럼 느껴졌다. 그러므로 이

빨강머리 소녀는 약속된 시간을 넘겨

늦게 도착한 초록지붕 집의 매튜

아저씨에게 이렇게 말할 줄 안다.


- 나오시지 않는 이유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저씨가 데리러 오지

않으면, 오늘 밤은 저 큰 벚나무

위에 올라가서 밤을 새울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마치 대리석으로 만든

널찍한 방에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을까요?



프롤로그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운 나의 앤에게


10년 전 봄, 침대에 누워 천장의

무늬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지쳐 있었다. 인간관계에서

실패했고, 소설가가 되겠다는 오랜

꿈에서 멀어졌고, 결국 회사에 사표를

냈다. 버튼 하나 누를 힘이 없었지만.


<빨강머리 앤> 50부작 애니메이션을

봤다. 끝까지 따라 부를 수 있는 내

인생 유일한 주제가가 흘러 나왔다.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이마가

툭 불거져 나온 이 수다쟁이 소녀는

내게 쉬지 않고 말이란 걸 했다.


엘리자가 말했어요.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져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는걸요.


될 줄 알았던 시험에서 미끄러졌을 때,

영원할 줄 알았던 애인과 헤어졌을 때,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거꾸로 가고 있었을 때, 오랫동안 꿈꾸던

것에서 멀어졌을 때, 다시 한 번 회사에

사표를 쓰게 됐을 때, 나는 앤의 말을

떠올렸다. 가끔은 앤에게 되묻고 싶기도

했다. 앤! 네 말처럼,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진 걸까?


린드, 아주머니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들은 축복받은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실망할 것도 없으니까.라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실망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더 한심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상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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