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란한 성숙> - by 우치다 타츠루
미성숙한 사회에서
성숙한 어른되기
세상세 간단한 성숙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성숙한 사회를 헤쳐
나가기 위한 우리의 고군분투
<곤란한 성숙>은
인문/교양 서적입니다.
서문
이 책이 나올 즈음이면 우치타 타츠루의
한국어판 책은 무려 10권이 넘지
않을까 합니다.
한국의 많은 독자들이 책을 일고 있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한국과 일본의 든든한 연대와 상호 이해는
동아시아의 중요한 외교적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본에서 저와 같은 생각은
소수 의견에 머물러 있습니다.
정치가도, 관료도, 저널리스트도 양국의 연대가
사활이 걸린 긴급한 문제라는 생각에 특별히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으니까요.
한국의 사정도 그리 다르지 않으리라 봅니다.
그렇다 해도 비관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정치적인 차원에서 두 나라의 연대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시민들이
실현하는 풀뿌리 연대는 확실히
튼튼해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책임을 지는 일은 불가능하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이 물음은 내 마음속 스트라이크 존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책임론은 나의 스승인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주제였습니다.
레비나스의 제자가 되겠다고 선언한
1987년부터 나는 책임에 대해
줄곧 생각해 왔습니다.
물음에 대한 나의 대답은 단순합니다.
그러나 그 이유를 밝히자면
도톰한 지면이 필요합니다.
물음은 이렇습니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가능할까요?
대답은 이렇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간단하지요? 그러나 그 까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꽤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준비가
되면 시작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로 끝날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남의 소중한 물건을
망가뜨렸을 때 그것을 원래대로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가령 의학이 눈부시게 발전하여 죽은 사람을
소생시킬 수 있는 세계가 있다고 칩시다.
그곳에서 어떤 사람이 당신을 죽였습니다.
도끼로 목을 쳤다든가 전기톱으로 몸뚱이를
딱 절반으로 갈랐다든가, 어쨌든 철저하게
야비한 방식으로 말이지요.
하지만 빨리 병원으로 이송을 하면 의사들이
잘린 곳을 이어붙이고, 상처 부위를 깨끗하게
매만지고, 전기충격으로 심장의 박동을 되살려
처참하게 피를 흘리며 죽은 당신을
살려 낼 수 있습니다.
병원으로 싣고 오는 수고는 전부
살인자가 해 주었습니다.
물론 치료비도 다 내주었습니다.
자, 이럴 때 살인자가
일단 내가 널 죽이기는 했지만
원래대로 되돌려 놓았으니까 이걸로 됐지?
한다면 당신은 그를 용서할 수 있을까요?
만약 책임을 진다는 것이 훼손한 것의 복구를
의미한다면 분명 이 살인자는 책임을
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필시
지금 장난하냐고 분노하지 않을까요?
생리학적으로 상처가 깨끗이 아물었다 하더라도
산채로 목이 잘릴 때의 고통과 절망은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 경험은 인간의 깊은 곳에 깃들어
있는 순수한 것을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파괴해 버렸습니다.
그때 잃어버린 것은 어떤 수를 쓰더라도
복원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극단적인 예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는 평범한 일상의 일들을
통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천박한 근성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혹은
당신은 밥을 너무 천박하게 먹어서 사람들이
보는 데서 같이 먹기 싫어 처럼
배우자나 연인에게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심한 말을 했다고 칩시다.
그런 직후에 자신이 심한 말을 했음을
깊이 반성하고, 내가 잘못했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 버렸어 하며
변명한다 한들 때는 이미 늦었지요.
끝장이 나 버렸습니다.
회복 불가능
세상에는 죄송합니다로 끝날 이야기가
있는 반면 죄송합니다로 끝나지 않을
이야기도 있는 법입니다.
대개는 사과하는 것으로 끝나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발을 밟힌 것만으로도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는 달려들어 칼을
휘두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과하는 것으로 끝날 이야기는
이 세상에 업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옳다고 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죄송합니다로 끝날 이야기는 없습니다.
어떤 손해든 없었던 일로 원상 복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애초에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은 이미 일어난 일이니까요.
불미스러운 일을 저질렀을 때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책임져 하며
으름장을 놓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내가 입은 손해를 당신이
원상 복구해 준다면 전부 다 없었던 일로
해 줄게 와 같은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런 짓을 저질러 놓고 어떻게
책임질 거야?
아무리 애를 써도, 없었던 일이 될 수는
없을 텐데? 와 같은 뜻으로 하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고대 법전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동죄형법 이라고 불리는 이 규칙은
미개인이 고안해 낸 잔인한 법률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지요.
어느 지점에서든 무한책임을 멈추어야 하기
때문에 법률로 그 이상으로 책임을 소급해서는
안 된다는 한도를 정해 놓은 것입니다.
눈을 찔려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사람이
상대의 눈을 찌를 권리를 가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눈을 찔려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사람이 상대의 눈을 찌르는
그 이상의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오히려 복수의 권리 행사를
억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눈을 찔린 사람이 실제로 가해자의
눈을 찌른다고 해서 시력을
회복할 리 없습니다.
시력은 보이지 않는 그대로이고 통증도
사라지지 않으며, 외모도 적잖이 일그러졌습니다.
상대의 눈을 찌른다한들 자신의 손해는
무엇 하나 회복할 수 없습니다.
책임을 지는 일이 원상회복을 의미한다면
눈에는 눈은 원상회복과는 거리가
먼 일일 뿐입니다.
결과적으로 책임을 질 수 없습니다.
동죄형법의 가르침은 어떤 일이든 한 번
일어나버린 일은 원상 복구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저지른 죄에 대해 인간이
충분한 보상을 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동죄형법은 책임지는 일의 불가능성을
가르쳐 줍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거기에 상응하는 어떠한 폭력으로도
아무리 많은 재화를 지불하는 배상으로도
치유할 수 없습니다.
레비나스는 <곤란한 자유>에
상처에서는 영원히 피가 흐른다는
말을 적은 바 있습니다.
나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책임이라는 말은 책임질 것을
요구받는 사태에 직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의외에 책임이라는 말을 생산적으로
사용하는 일은 없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책임져라는 말은 당신은
영원히 책임을 질 수 없다는 저주입니다.
대가를 치른다면 용서받을 수 있다고
가능성을 열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학교에서 집단 따돌림을 당한 아이가
자살했을 때 부모가 가해자 아이의
부모와 학교장, 담임선생님을 상대로
1억 엔 손해배상을 청구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것 역시 1억 엔을 배상하면
용서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배상액은 상대방의 평생을
망가뜨릴 수 있는 금액으로
산정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손해배상 청구를 통해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는 배상의
불가능성을 고지하고 있습니다.
책임져라는 말에는 책임을 지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책임을 지라고
하는 것 이라는 뜻이 숨어 있습니다.
따라서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가?
하는 의문문은 이미 잘못된 것입니다.
책임은 질수 없으니까요. 그누구도
책임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부분은 단 하나입니다.
책임질 것을 요구받는 입장이
되지 않을 것. 오직 이것뿐입니다.
자칫 착각을 하면 곤란한데
이는 어떤 일에 대해 난 모르는 일이야
난 관계가 없으니까, 나는 책임이 없어 같은
변명을 마련해 놓고 도망치라는 뜻이 아닙니다.
완전히 그 반대입니다.
나는 책임이 없어 하고 완강하게 버티는
사람은 어떤 불상사가 일어나든
남이 어떤 상처를 입든
시스템이 무너지든 줄행랑을 칩니다.
그런 말을 외치는 사람만 있다면
세상이 어떻게 될까요?
자신의 권리를 유보하는 사람만으로 구성된
사회를 상상해 보십시오.
오싹하지 않습니까? 전기는 끊어지고,
수도는 나오지 않고, 전차도 다니지 않으며
은행의 현금인출기는 먹통이 되고
전화 통화도 안됩니다.
모든 기능이 제대로 돌아가는 사회
먹고살 만큼 윤택하고 규칙을 잘 지키고
안전한 사회에 살면서 책임질 것을
요구받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아가려고
하면 할 일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내가 책임을 질게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역설절인 결론
조금만 생각해 보면 금알 알 일입니다.
구성원 전체가 책임이 없다며 발뺌을 하고
불상사가 생기면 곧바로 그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사회와 구성원 전체가 자기의 힘이
닿는 범위에서 저마다 다양한
' 국내도서 정보 > 인문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천책] 비난의 역설 - by 스티븐 파인먼 (0) | 2017.02.25 |
---|---|
[인문추천책] 탁월한 사유의 시선 - by 최진석 (0) | 2017.02.22 |
[추천인문책] 존엄한 죽음 - by 최철주 (0) | 2017.02.18 |
[추천책] 수치심의 힘 - by 제니퍼 자케 (0) | 2017.02.13 |
[인문학 추천도서] 외로운 도시 - by 올리비아 랭 (0) | 2017.0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