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한 사유의 시선> - by 최진석


지식을 버리고 철학을 시작하라

인문학자 최진석 교수가 제시하는

생각의 노예에서 생각의 주인이 되는 법


부정, 기존의 가치관을 버리다

선도, 시대의 흐름을 포착하다

독립, 익숙한 나로부터 벗어나다

진인, 인격적으로 참된 나를 찾다



철학의 시작은 곧 전면적인 부정이고

이것은 새로운 세계의 생성을 기약하는 일이다.

새로운 생성이란 전략적인 높이에서 자기 주도적

시선으로 세계를 보고 스스로 자신의 나아갈

길을 결정한다는 뜻이다.


스스로 그 길을 결정하지 못하는 한

항상 종속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종속적인 한, 우리는 주도권을 잡고

자신의 삶을 꾸리거나 자신이 속한 사회의

새 방향을 이끌어내기 어렵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우선 부정 버리는

일이 필요하다.



서문


이 책은 2015년 건명원에서 한 5회의 

철학 강의를 묶은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철학 수입국으로 살았다.


보통 수준의 생각은 우리끼리 잘하며 살았지만

높은 수준의 생각은 수입해서 산 것이다.


다른 사람이 한 사유의 결과를 숙지하고

내면화화면서도 스스로 생각한다고 착각해왔다.

수입된 생각으로 사는 한 독립적일 수 없다.


그렇게 하면 당연히 산업이든 정치든

문화든 가장 근본적인 면에서는 종속적이다.


이런 삶을 벗어나고 싶다.


훈고에 갇힌 삶을 창의의 삶으로 비약시키고 싶다.

종속성을 벗어나서 독립적인 삶을 함께 누리다 가고 싶다.

남들이 벌여놓은 판 안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그물 사이를 비집고 다니는 일은 이제 지겹다.


우리는 정말 우리 나름대로의 판을

벌여보는 전략적인 시도를 할 수 없을까?

선도력을 가져볼 수 없을까?


그 질문에 철학적인 높이에서 답해보려는

시도가 바로 이 책이다.


남이 해놓은 생각의 결과들을 내면화하는 

일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이 책의 내용이

철학적인 논의가 아닌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 책은 철학에 관한 책이지

철학 자체가 아닐 수도 있다.

철학이 아니어도 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 삶의 독립성을

확보하는냐 확보하지 못하느냐다.


무엇으로 불려도 좋으나

우리의 삶을 각성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보려고 덤빌 수만 있다면 그만이겠다.


최소한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아니었다는

감춰진 사실만이라도 스스로에게 노출되면 좋겠다.


1강 부정 : 버리다



대립의 공존을 통한

철학적 차원의 사유


우리가 처한 한계를 뛰어넘게 해주는 것이

인문적 시선이고

철학적 시선이며

문화적 시선

예술적 시선이다.


이 높이에서만 창의적이고 주도적인

활동성이 나오기에 우리는 이 높이의

사유를 획득해야만 한다.


      대립의 공존이 대립을 돌파한다


지금 우리에게 철학이란 무엇이고 철학은

우리에게 무엇이어야 할까요?


여기 이 자리에서 우리 나름대로 철학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함께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철학을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건명원의 뜻을 살펴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건명원의 자에는 해와 달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대립된 두 존재가 개념적으로 하나가 된 것이지요.

해를 해로만 보거나 달을 달로만 보는 것을

라고 하는데, 자는 그런 구획되고 구분된

를 뛰어넘어 두 개의 대립면을 하나로

장악할 수 있는 능력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사실상 우리들 대부분은 자신이 붙들고 있거나

몸담고 있는 한쪽 세계를 온전한 전체로

쉽게 착각하고 삽니다.


특정한 한쪽의 세상을 빛나게 해주는 해나

또는 다른 한쪽만을 비추는 달을 유일한

빛으로 착각하는 것이죠.


우리나라는 너무도 오랜 시간을

이념 대립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모두 각자 자기 입장에서 자신만의 해와

자신만의 달을 붙잡고 자신이 믿는 이념 만을

진실이라 강변하며 상대방만을 비난하고 탓합니다.


우리나라가 한 단계 더 진보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가장 시급한 일은 이 극단적인

이념 대립에 빠지는 지적 단순함에서 

빠져나와 각자 자신의 벽을 넘어서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대립에 갇히지 않고

오히려 대립을 품어 안는 내적 공력을

키워 지속적으로 변증법적 상승을 해야 합니다.


여기서 내적 공력이란 자처럼 대립된

해와 달을 동시에 품는 공력, 다시 말해

대립의 공존을 장악하는 힘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 대립의 공존을 장악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아름답고 좋기 때문이 아니라

우선 그것이 실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미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대립을 돌파 할 수 있는

힘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이 비로소 우리의 수준을

한 단계 상승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꿈쩍 않고 정체되어 있는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을 갖게 됩니다.


건명원의 자도 흔히 쓰는 큰 입구 변의 자나

기관을 나타내는 자를 지양하고 확 뚫린

들판 자를 썼는데 이것도 의도적입니다.


자나 자에는 담장을 두르고 있다는

의미가 있어서, 어딘가 테두리 안에 한정되어

보이는 반면에 이 원자는 테투리가 없이

확 펼쳐져 있는 야성적 들판

아직 무엇으로도 정해져 있지 않아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열린 공간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함의를 갖는 건명원이 탄생한 이유는

과거나 외부의 것을 답습하기만 하는

훈고적 사고, 우리 사회의 오래된 정체,

기존의 틀 안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 대한 답답함

그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손실이

걱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직면하고 있는 이런 문제들을 극복하고

우리 사회가 한 단계 더 상승하지 않으면

우리 생존에 상당히 심각한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바로

건명원이 탄생한 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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