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마음 보고서> - by 하지현


불확실한 시대, 우리를 위한 심리학


혼밥과 먹방, 밀실과 광장, 쿨과 데이트폭력

우울증과 공황장애, 정보 과잉과 결정 장애


이 사이를 진자 운동하고 있는

우리 마음은 과연 어떤 상태인가?



우리의 마음은 지금 어디에 서 있고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버티는 것만이 답인 시대

인간다운 삶을 위한 심리학적 응답


1부 마음이 위험하다


마음의 체력

더이상 참고 싶지 않다?


새로운 형태의 정신승리


알아서 할 테니까 기다려주세요.

재촉하지 말란 말이에요.

완벽하게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라면

아무 의미가 없어요.

20대 중반의 젊은이가 말한다.


그는 별 문제 없이 무난하게 잘 자랐다.

중산층 부모가 적극적으로 돕고, 본인도

공부를 잘한 덕분에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


여느 대학생이 그러듯 대학교 1학년을 마친

뒤 휴학을 하고 입대를 해서 군 복무를 

끝낸 후 복학을 했다.


3학년을 마친 다음에는 1년간 해외

어학연수도 갔다 왔다.


4학년 떄는 취업 준비를 하고 대기업 여러

곳에 원서를 냈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더이상 미룰 수 없어 졸업을 한 다음에도

도서관에 나가서 취업 준비를 했다.

2년이 지났지만 안타깝게도 원하는 곳에

취업하지 못했다.


은퇴를 한 부모는 지금까지 투자한 게

아까워 기다리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빨리 중소기업에라도 자리를 잡고

결혼했으면 싶다.


넌지시 기회를 봐서 여기 원서 한번

넣어보면 어떠니?라고 이야기해보지만

아들은 짜증만 부린다.


혼자 방에서 소리를 지르는 등

하지 않던 공격적 행동이 늘어갔다.


그런 시간이 지속되다가 최근 반년은

그나마 하던 공부도 작파하고, 취업 사이트는

열어보지도 않은 채 퍼져 지내기 시작했다.


점심때까지 방에서 잠만 자는 것 같아

혹시 우울증에 걸린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어 부모가 아들을 데리고 나에게 온 것이었다.


증상을 듣고는 나도 반복된 좌절에서 온 무력감으로

생긴 우울증일 거라 짐작하고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았다.


그런데 웬걸, 훤칠한 키에 멀끔한 얼굴의 청년은

나와 눈도 잘 마주쳤고, 나를 만나고 있는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눈치였다.


면담을 해보니 취업 실패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졌지만 지금 상태는 임상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수준의 우울증은 아니었다.


청년은 속이 타는 심정은 부모와 마찬가지였지만

그렇다고 불안해 보이지 않았고, 지금 상태에 대해서

조바심을 내는 것 같지도 않았다.


흘러가는 시간의 초침을 불안하게 바라보는 것은

부모일 뿐, 당사자인 청년은 현실의 문제를 초월한

득도자의 여유를 가진 것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면담이 끝난 후 청년에게 치료가 필요한 상태는

아니라고 설명하면서, 뭐라도 도와야겠기에

현실적인 실천 방안에 대해서 몇 가지 조언을 했다.


이때 돌아온 대답이 바로 서두의 말이었다.

덧붙여서 재빠르게 내가 제시한 대안의 문제점까지

얘기하는 것을 보면 청년은 이미 내가 그런 말을

할 것이라 예상했던 것 같았다.


지푸라기도 잡아보려는 마음에 나를 찾아온

부모를 진료실 밖으로 배웅하면서 보니

그들의 어깨는 확연히 축 쳐져 있었다.


하지만 문제의 당사자인 청년은 여유로워 보였다.

봐요, 난 아무 문제 없다니까요라는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고 인증이라도 받은 듯했다.


아, 저것이 소위 정신승리라는 것이구나

하고 깨닫는 순간이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저런 방식으로 정신승리를

하는 젊은이들을 자주 만난다.


열심히 준비하고 있고, 완전히 준비가 되면

알아서 일을 할테니 그때까지는 간섭하지 말고

내버려두라는 것이다.


이상은 높고, 익숙한 공부는 열심히 한다.

공부가 어느 수준에 도달해도 결과로 이어지지

않지만 그래도 그저 익숙하니까 공회전하듯이

준비라는 이름으로 공부를 하고 있을 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불안하니까.


세상에 대한 그들의 시선은 날카롭고 정확하다.

비판적인 시각도 예리하다.

웬만해선 부모가 말싸움으로 이기기 어렵다.

컴퓨터, 스마트폰, 인터넷으로 습득한 최신

정보는 풍부하다. 


그러나 막상 실천하고 있는 것은 없다.

그들의 핵심적 문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당연히 질 일도 없다.


이들의 정신승리의 기제는 지지 않는 것이다.

한번 붙어서 무승부나 동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승부를 겨루지 않음으로써 지지 않는 것이다.


타석에 서보지 않은 채 스윙 연습만 하는

가능성 있는 드래프트 1순위의 4번 타자다.


타석에 서서 헛스윙을 하거나 땅봉을 쳐서

아웃이 되면 부끄럽고 속상할 것이다.


그러나 그 덕분에 뭘 더 훈련해야 하는지

알 수 있게 되고, 이런 경험치가 쌓이면 실력은

결국 향상된다.


경험을 통한 성장이다.


하지만 실패가 부끄럽고 아파서 경험을 피하기만

하면 당연히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긴 것도 아니고 진 것도 아닌 상태

가능성만 놓고 보면 이길 수도 있는

상태를 유지해 정신승리를 고수한다.


현실에서 벗어나 마음만은 편해진다.


여기에는 청소년기의 무의식적 심리 기제가 한몫한다.

20세기 중반부터 청소년기가 늘어났다.

몸의 2차상징이 나타나는 시기가 10대 초반으로

앞당겨졌지만, 뇌의 전반적 발달은 20대 중반에

완성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심리적 영역에서의 청소년기는 생물학적

청소년기와 일치하지 않고 연장된 셈이다.


1960년대 정신분석가 데이비드 엘킨드는

청소년기 자기애의 특징을 다음 세 가지로 설명했다.


무엇이든 다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전능감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자기만의 독특한 존재감

절대 파괴되거나 다치지 않을 거라는 불멸성의 믿음이 그것이다.


이들의 독특한 정신승리는 이런 청소년기 자기애의

특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이 전능하고, 어떤 위기에도

다치지 않으며, 유일무이의 독특한 존재여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다.


자기만의 껍질 안에 있을 때에는 그 자기애의

환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어쩌다 껍질 밖으로 나가볼까 하고

고개를 살짝 들어 세상에 코를 내미는 순간

찬바람이 장난 아닌 것이다.

어이쿠 하고 다시 고개를 움츠려

알 안에 머무르기만 한다.


이런 변화는 지금 젊은이들의 부모세대의

영향도 적지 않다. 진 트웬지 캘리포니아 대학

샌디에이고 캠퍼스 심리학과 교수는 자기중심세대에서

미국의 신세대를 분석했다.


그는 우울, 불안증을 가진 청소년의 비율이

대공황기에 비해 현재가 다섯 배나

많다는 기묘한 통계를 제시한다.


지금의 10대는 부모의 과도한 칭찬을 받으면서도

적당한 좌절을 경험하지 못하며 자란 탓에

극대화된 유아적 자존감이 그대로 남아 있다.


결국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고 자기중심적이며

부를 숭상하고 자의식이 지나치게 강하다.


타인의 적절한 비판을 부적절한 비난으로

받아들이고 이에 강한 분노로 반응한다.

이런 유의 반응만 하면서 자기만의

환상 속에서 자족한다.


그런데도 역설적으로 내면은 불행하다.


현실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고

자신이 실제 승리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정도의 현실 인식 능력은 있기 때문이다.


이 상황은 고스란히 한국의

젊은 세대에도 적용될 수 있다.


미국뿐 아니라 한국의 중산층 부모 역시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올인 해왔다.


아니 미국보다 우리나라가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가 잘되는 것이 자신이 잘되는 것이라고

종교 수준으로 믿었다.


고학력 전업주부 1세대인 60년대 중반

이후에 출생한 여성들은 자기들이 공부로

성공했듯이 아이들도 그래야 한다고 여겼다.


그리고 자신의 지적 능력을 육아에 쏟아부었다.

전업주부가 하나의 전문직이 되었고, 본인의

경력 단절을 아이의 성공을 통해 보상받으려 했다.


이들 전업주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보가 부족할

수밖에 없는 일하는 엄마들은 아이에 대한 그

미안함을 물량 공세로 보완했다.


기말고사 기간에는 배달음식점이 성수기를 맞고

아빠는 집에 최대한 늦게 들어오고

들어오더라도 TV도 켜서는 안 된다는 것은 불문율이다.


이 정도로 모든 것을 아이를 중심으로 생활해왔다.


그런데 문제는 의외의 곳에서 발생한다.


자녀가 경쟁에서 이기기를 바라는 부모는

아이 대신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선택해줬다.


덕분에 아이는 시행착오를 거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가진 성인이 될 수 있었지만 결정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갖출 기회를 놓쳤다.


결국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고, 무엇을 결정하지도

모험하지도 못하는 어른이 되어 세상에 나갈 문앞에

서게 된 것이다. 아이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했던 것들이

사실은 아이에게 독이 되어버린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이상 <대한민국 마음 보고서>였습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