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을 파는 상점 > - by 김선영


제1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 수상작인

시간을 파는 상점




첫 번째 의뢰인, 그놈


사물함이 있는 복도를 들어서자, 온조의

심장은 사정없이 두근 거렸다. 거짓말일

지도 모른다. 장난일지도 모른다. 사물함

에 다가 갈수록 심장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사물함의 자물쇠는

정자세로 곧추서 있다.


전기가 훑고 지나가는 것처럼 머리칼이

쭈뼛 일어섰다. 분명 그놈이 단단히

잠가놓은 것이다. 온조는 평소에

사물함을 잠가놓지 않는다. 자물쇠만

걸어놓고 번호를 돌려놓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매번 번호를 맞춰 따는 게

성가시기 때문이다. 이게 다 게으른

탓에 낚인 일이다.


잠겨 있는 폼이 사물함에 제법 굵직한

비밀이 담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온조는 자물쇠의 번호를 맞추며

차라리 의뢰인의 장난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장나이라면

통장에 돈이 입금될 리가 없다.




분명 네곁에라는 아이디가 통장에

찍혔고 그 옆에 위험부담 비용까지

더 얹은 금액이 입금되지 않았던가.

번호를 맞추자 자물쇠 열리는 소리가

났다. 온조는 숨을 고르느라 잠시

멈칫했다. 눈을 감고 하나, 둘, 셋을

헤아렸다. 제발 아무것도 없기를.


세상에, 구기박질러 놓은 체육복 바지

아래 삐죽이 나와 있는 저것은 분명

최신형 PMP다. 어쩌면 좋아. 온조는

누가 볼세라, 엉걸겹에 사물함 문을

쾅 닫아버렸다.


야, 백온조 사물함에 뱀이라도 있냐?

화장실을 다녀오던 홍난주가 봤다.


안 되는데, 난 뭘 해도 이렇게 티가 나냐.


온조는 등으로 사물함 문을 기대 눌렀다.

마치 아나콘다 한 마리가 무시무시한

힘으로 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온몸으로

저지했다. 아, 아, 아냐. 영어 보충교재를

또 집에 놓고 왔네. 사물함에 있는 줄

알고 안 챙겼더니.


그걸 가지고 뭘 그렇게 사색이 되시나?

옆 반 가서 빌려오면 될걸. 내가 빌려다

드릴까나? 백조공주?


난주가 놀림 반 진담 반으로 물었다.


그래, 지체 말고 다녀오거라.

한눈 팔면 죽느니라.


온조는 너스레를 떨며 난주의

말투에 맞춰 답했다.


난주는 온조의 머리를 쥐어박는

시늉을 하며 사물함 복도를 빠져나갔다.


온조는 얼른 뒤돌아서 사물함에 다시

자물쇠를 채웠다. 자칫하다간 도둑으로

몰릴 수 있는 일이다. 아니 지금이 딱

도둑이다. 장물 소지만큼 도둑이라는

명확한 증거가 없다.


그래서 의뢰가 들어왔을 때 간곡하게

거절하지 않았던가.


크로노스: 네곁에 님, 이 일은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훔친 물건을 제자리에 갖다 놓는 거라면

너무나 위험하며 자칫 잘못하다간 님은

물론 저도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네곁에생각보다 실망인데요. 제가 찾던

멋진 곳을 발견한 것 같아 무척

기뻐했는데, 기대 이하인데요.


크로노스손님이 의뢰하신 이 일은

사실 제겐 첫 번째 일입니다. 이렇게

난감한 일이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

하지 못했습니다. 제 상점이 이렇게

불온한 일에 쓰인다면 전 카페를

폐쇄하겠습니다. 제 의도는 카페

대문에도 밝혀놓았듯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제가 그 일을 함으로써

저에게도 금전적인 도움은 물론 정신적

보람까지 얻고자 한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온전히 성립되지 않는다면

저는 절대 행동하지 않을 겁니다.


네곁에주인의 상도덕이 아주 마음에

드는데요. 그렇다면 이 일은 확실히

이 상점의 목적과 취지에 딱 맞는

일인데요? 저를 도와줄 수밖에 없겠

는데요. 아닌 꼭 이 일을 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크로노스납득이 가지 않는군요.


네곁에이렇게 쪽지로 왔다 갔다 하기에는

사연이 깁니다. 그 이야기는 제가 메일로

보내드리죠. 아, 한 가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그 물건은 제가 훔친 게 아닙니다.

뭐, 믿거나 말거나 듣는 사람 마음이지만,

어쨌든 저는 이 일에 발을 들여놓았고

그에 대한 책임도 있습니다. 이젠 크로

노스 님과 나, 이미 비밀의 일부를 알았

으니 둘 다 무관하지 않다는 건 확실

합니다. 주인장도 이 일로부터 이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알겠죠? 이 정도 가게를 인터넷에

오픈할 정도면 그만큼 세상을 읽을

줄 안다는 뜻 일테니까요.


크로노스이보세요, 손님, 지금 그걸

협박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전 아무것도

아는 게 없습니다. 괜히 끌어들이지 마세요.

그리고 누가 훔쳤든 그건 관심 없습니다.

어쨌든 이 일은 맡지 않겠습니다.


네곁에아, 흥분을 가라앉히시고 성급하게

결론 내리지 마세요. 곧 메일을 보내겠습니다.

보시면 다시 생각하게 될 겁니다.


그렇게 네곁에는 사라졌다. 공짜는 없다더니

엄마 말이 딱 맞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을까마는 이렇게 처음 들어온 일이 발목을

잡고 난감하게 할 줄은 몰랐다.


놈에게 메일이 온 건 그다음 날,

바로 어젯밤이었다.


우선 이 일을 의뢰할 수 있는 곳이 생겨

정말 고맙게 생각합니다. 저는 그만큼

이 상점을 믿으며 상점의 주인장을

믿습니다. 제 믿음의 삼분의 일이라도

주인장님이 갖고 있다면 제 진심이

전해지리라 믿습니다.


일 년 전 일입니다. 벌써 잊혀지고 있는

일이지만 전, 친구 하나를 잃었습니다.

그것도 제 눈앞에서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아, 주인장도

알겠군요. 친구와 나, 주인장 모두

같은 학교니까요. 그날 아침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지만 주인장을

설득해야 하니 어쩔수 없군요.


이상 < 시간을 파는 상점 >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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