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춘의 독서 > - by 유시민

100년 후에도 모든 젊을을 뒤흔들

위험하고 위대한 질문들

한 사람의 영웅이 과연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불평등은

불가피한 자연의 법칙인가

불평등은 불가피한 자연의 법칙인가


< 청춘의 독서 >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


혁명은 과연 가능한가

세상의 진보를 믿어도 되는 걸까


01 - 위대한 한 사람이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고등학생 시절, 공부가 잘되지 않으면

문고판 책이 많았던 아버지의 서가에

서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책이나 뽑

아 뒤적이는 버릇이 있었다.


마음의 끌리는 책이 있으면 기분 전환이

될 때까지 읽다가 덮어두곤 했다. 이렇

게 띄엄띄엄 읽었던 책들 가운데 몇몇

은 지금도 제목과 내용이 대충 떠오른다.


나는 죄와벌 소설 도입부의 문장 하나에

그대로 꽂혀버렸다.


- 그런 일을 저지르려고 하면서, 이토록

하찮은 일을 두려워하다니! 그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여기서 그런 일은 살인이다. 이토록 하찮은

일 이란 하숙집 여주인과 마주치는 것이다.

전당포 노파 알료나 이바노브나를 죽이고

돈을 훔치기로 결심한 주인공 로지온 로마

노비치 라스꼴리니꼬프는 현장을 미리 답

사하기 위해 하숙집을 나섰다.




그런데 그런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려고

하는 사람이, 집세와 식대가 밀려 있다는

사실 때문에 주눅이 든 나머지 혹시

계단에서 하숙집 여주인과 마주칠까봐

마음을 졸였다. 주인공은 자신의 그런 모습을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비웃었던 것이다.


가난은 누구의 책임인가


결국 라스꼴리니꼬프는 전당포 노파를 죽였다.

범죄에 쓴 도구는 도끼였다. 자기가 예측한 것

과 달리 바로 그 순간 현장에 나타났던 노파의

배다른 여동생 리자베따도 같은 방법으로 죽

였다. 이것은 계획하지 않은 살인이었다.


그런데 이 엽기적인 범죄를 저지른 살인범

라스꼴리니꼬프는 악한 인간이 아니다.

못된 짓은 한 적이 없는, 선량한 대학생이다.

자기도 돈에 쪼들리면서 폐결핵에 걸린 친구

를 도우려고 얼마 남지 않은 생활비를 다

써버리고, 그것도 부족해 그 친구 아버지

장례도 치러주었다.


심지어는 살인을 한 뒤에도 선행을 했다.

술집에서 우연히 알게 된 퇴역 관리

마르멜라도프가 만취 상태에서 마차에

치여 죽자, 어머니가 빚을 내 보내준

학자금 25루블을 마르멜라도프의 아내

까쩨리나 이바노브에게 장례 비용으로

쓰라며 몽땅 줘버린다. 마르멜라도프의

딸 소냐와 라스꼴리니꼬프의 인연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인간의

삶이 위험의 바다를 향해하는 것임을

아직 알지 못했다. 내가 죄와벌에 꽂

혔던 것은 그 소설의 문학적 향취나

극적인 재미 때문이 아니라 도스토옙

스키가 정밀하게 묘사한 제정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뒷골목의

음산한 풍겨과 여러 등장인물들이

겪는 철저한 가난에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어린 시절 경주와 대구에서

직접 보고 겪었던 절대 빈곤보다 훨씬

더 끔찍한 참상이었다. 도스토옙스키가

설정한 소설의 시공간적 배경이 100년도

더 전인 1860년대 제정러시아였다는

사실을 나는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사람을 죽였지만

근본적으로 선량한 사람이다. 그가

본의 아니게 죽인 리자베따도. 가족

을 부양하기 위해 몸을 판 소냐도

모두 착한 사람이다.


소냐의 아버지 알코올중독자 마르멜

라도프와 계모 까쩨리나 이바노브나도

결코 악한 인간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그들 모두는 말할 수 없이

가난하다. 어째서 착한 사람들이

이렇게 가난하게 살아야 할까?




인간 사회는 이러한 부조리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죄와 벌을 읽는 동안

내내 이런 의문이 나를 사로잡았다.

1970년대 후반 대한국과 소설 속에

나오는 1860년대 제정러시아가 근

본적인 차이를 발견하기 어려운 비

슷한 사회로 보였다.


그때 대한민국은 조세희 선생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이동철이라는 필명을 쓰는 정체불명

작가의 < 어둠의 자식들 >과

<꼬방동네 사람들>을 낳은. 정의가

짓밟히고 악당들이 활개치며 착한

사람들이 멸시당하는, 바로 그런

나라였기 때문이다.


나는 <죄와 벌>을 읽으면서 가간의

책임이 가난한 사람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사실 생각이라기보다는 느낌

에 가까웠다. 사회제도와 빈곤의 상

호관계 또는 인간관계를 논리적으로

인지한 것이 아니었기에 느꼈다고

말 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이 느낌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불러왔다.

만약 개인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사회적 악덕이 존재한다면,

그러한 사회악은 도대체 왜 생겨났는지?

사회악을 완화하거나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죄와 벌은 내가 이 의문을 풀기 위해

떠난 독서와 사색, 행동과 성찰, 지금

도 끝나지 않았으며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는 그 기가긴 여정의 출발점이었다.


이상 < 청춘의 독서 >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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