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의 여인들> - by 최문희


365일 책을 소개하는

Stories Book입니다.


오늘 소개 드릴 책은

<정약용의 여인들>이라는

한국 소설 서적입니다.


나는 피와 살을 가진

보통의 사내에 불과했소.


정약용의 생을 관통한 불명의 여인들

사랑과 증고, 그리움과 회한으로 얼룩진

정약용의 가장 내밀한 일대기



세상의 끝에서 홀연 나타난

진솔이라는 여인이 안겨준 평온.

나른한 휴지를 그는 탐욕스럽게

껴안았다.

깊고 따스하고 청결했다.


서문


이 서사는 못다 한 그리움의 부스러기다.

다산 정약용의 생을 관통한

인간적인 고뇌에 묵언이다.

말 없는 말, 소리를 실어내지

않는 침묵의 언어로.


가슴 싶숙이 보듬어 안았던 지존,

못다 한 충정일까, 사모일까.

제자, 황상, 아궁이 속의 불씨 한 점

냉동된 상처에 치유의 온기를 채우고

진솔, 구강포의 여인이여.

중동 잘린 다산의 남루를 보듬어

다독인 진솔

부서져 가루가 되어도

사랑이라 읊조리던 여인.


포기할 수 없는 자의 항변은

수백 권의 저서로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값할 수 없는 보배로

불명의 들불처럼 타오른다.


여유당의 적막


기쁘지 아니한가?

정약용이 마재의 집 대문을 넘으면서

스스로에게 물어본 첫마디였다.

안채와 사랑채, 마당에 팬 집 시렁

물의 작은 홈까지, 잠시의 외출에서

돌아온 듯 그대로였다.


사물에 따라 시간이 주는 변화의

무늬는 달랐다. 그는 지팡이를 짚고

더듬거리며 문지방을 넘는 자신의

쇠락에 마른침을 삼켰다.


순간 중대문 턱에 걸려 휘청, 앞으로

쏟아지려는 몸피를 큰아들 학연이 부축했다.




열여덟 해, 묵은 그리움이 들썩였다.

반기는 얼굴들이 그의 걸음 나비에

밀려 뒤처졌다. 넘치면 모자람만 못한 것이라,

말 같지 않은 말이 지금 그의 마른 혀끝에서

바장였다. 다물린 입술 꼬리를 꺼당겨

올렸지만 뭉친 안면 근육은 풀리지 않았다.


그가 작게 구시렁거렸다.

멀미를 달고 왔음이야, 

누가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아버님, 오르세요.

학연의 팔 힘에 실려 축담에서

마루로 마루에서 방으로 붕 뜨는

걸음이었다.


약용이 학연을 보고 목이 마르구나

차를 달일 수 있겠느냐?

나직이 일렀다.


입이 마르기도 했지만 차를 마시면서

아내 혜완에게 할 말이 있었다.

찻잔을 놓고 마주앉자 부드럽고

간절한 목소리로 속삭여야 할까.

유배는 감옥이고, 그 깜깜 지옥의 내용은

진솔이었노라고 말한다면

염치없음의 극치일까?


하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라 하지만, 나는 피와 살을

가진 보통의 사내에 불과했소.


내 몸뚱이에 얼음꽃이 슬어 운신이 

어려울 때 진솔이 한 줌의

온기로 날 데워주었다오.


혜완의 얼굴이 환하게 벌어질까?

불쏘시개였단 말인가요?

다만 그대를 태운 기름이었단 말이군요.


재가 되진 않아쏘. 반수라도 이리 건재해서

돌아오지 않았소. 내가 홍임 모에게 건네준

건 나무 비녀 하나에 불과하오.


순간 그는 혀를 물었다. 

진솔이 불쏘시개였노라고, 나무 비녀나

불쏘시개나 한 줄에 꿴 맥락일 터,

해명을 위한 헛말인지, 진심에서

한 말인지 그는 잠시 헷갈렸다.

입에서 뱉어진 순간 불쏘시개로

규정된 실체가 거기 서 있었다.


혜완이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진의를

확인하려는 듯 눈을 치떳다.

그는 고개를 흔들었고, 눈을 내리깐

채 고요를 거느렸다.


혜완은 그가 풀어내는 나직한 동작에

설핏 웃음기를 머금었다.

나무 비녀라, 그 한마디에 혜완이

소슬했던 가시를 내려놓았다.


떠보고 살피고 헤집어보았지만 그의

심실에 가두어둔 은밀한 문양은

더 캐내질 것 같지 않았다.


혜완은 그의 단순 솔직한 성정을

잘 알고 있었다.


눈앞에 보이지 않는 대상을 가슴에 품고

부대낄 사람이 아니었다.

섬세하고 조근거리는 사랑 놀음에

그의 남성적 소질은 별로였다.

대상이 다르다고 그 심리적 근간이

달라질까, 혜완은 흐트러진 심사를

긁어모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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