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난의 역설> - by 스티븐 파인먼


비난은 도덕의 관리자다.

비난이 없으면 법치와 준법의 본질이 훼손된다.


비난의 순기능에 관한 대담한 통찰

비난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정부와 기업이 책임을 다하도록

적극 비난하라.


잘못과 불의를 바로잡는 시작이 될 수 있다.




프롤로그


비난은 문제의 시작이 될 수도,

문제를 풀어나가는 해결책이 될 수도 있다


비난은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다.

비난은 우리가 삶을 형성한다.


비난은 우리가 스스로를 자리매김하기 위해

사용하는 온건한 방법일 수도 있고, 부드러운

언쟁일 수도 있으며 상대방에게 독이 되고

커다란 상처와 충격을 주는 일일 수도 있다.


비난은 결혼 생활을 깨뜨릴 수도 있고

직장 동료와의 관계를 망가뜨릴 수도 있다.


중요한 사회적 프로젝트를 무산시킬 수도 있고

막강한 기업에 심각한 손해를 입힐 수도 있다.


정부를 뒤엎을 수도 있고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으며

인종 학살을 정당화하는 데 쓰일 수도 있다.


일상에 너무나 깊숙하게 스며들어 있다 보니

비난은 으레 있는 일로 당연하게 여겨지기 쉽다.


아무 신문이든 하나 펼쳐보라.


무언가에 대해 비난하는 기사가 숱하게 

실려 있을 것이다.


<뉴욕 타임스> 12개월 치를 비난이라는

단어로 검색하면 1만 1000건가량의 기사가 나온다.


우리는 비난 강박 상태에서 살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비난거리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상단

부분 뉴스에, 즉 뉴스의 기제와 정치 동학에 좌우된다.


잠재된 공포를 자극하고 특정 대상을 손가락질하는 

것이 이른바 잘 팔리는 기사를 만드는 공식임은

널리 알려진 바이며, 때로 언론은 이런 점을

대놓고 활용한다.


비난은 어떤 문제를 설명해주는 듯

보이기 때문에 주목받는다.


왜 실업 문제가 생기는가?


정부가 잘못해서 그렇다.


외국인이 우리 일자리를 

다 가져가서 그렇다.


왜 범죄가 증가하는가?


경찰이 무능해서 그렇다.


가출 청소년 때문에 그렇다.


비난은 무언가에 의미를 갖다 붙이고 그것을

다른 이들과 공유할 수 있는 간편한 방법이다.


또 비난은 위협이나 상처나 슬픔을 느낄 때

곧바로 가져다 쓰기 만만한 것이기도 하다.


비난은 상대방에 대한 추궁의 언어이자 자신에

대한 보호의 언어다. 그리고 많은 경우 

비난에는 감정이 실린다.


우리는 대개 화나고 분하고 치가 떨려서 비난을

하는데 이런 감정은 우리의 시야를 

급격하게 좁혀버린다.


어떻께 해서 비난이 우리 삶에 

이토록 중요해졌을까?


비난은 어떤 좋고 나쁜 결과들을 낳았을까?


이 책은 이런 문제에 대해 답을 

찾아나가려는 시도다.


교과서처럼 종합적으로 다루었다고

자처할 수는 없다.


나는 비난에 대한 논의 중 생각할 만한 점이

있는 주제들을 골랐고, 특히 심리학과 사회학적

관점에서 탐구할 수 있는 것을 중심 내용으로 삼았다.


합당한 비난과 분노가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 사회는

상상하기 어렵다. 비난이 없다면 도덕규범은 실천이

보장될 수 없고 법적 구조도 지탱될 수 업다.


비난의 어원은 고대 기독교에서 훈계와 배척을

의미하던 블라스페마레다.


비난은 흥미로운 역설을 담고 있다.


사회에 필요하고 순기능적인 속성이 있는 

한편 뒤틀리고 파괴적인 속성 또한 갖고 있다.


자고로 사회에서 비난은 구별 짓기의 기제로 사용돼왔다.


특정한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누구인지

혹은 그들이 무엇을 나타내는지를 가지고 비난받았다.

중세에 마녀가 비난의 대상으로 지목됐다면

오늘날에는 동성애자, 소수 인종, 집시, 난민 등이

비난과 배척의 대상이 되곤 한다.


하나의 집단이 악마화의 대상에서 벗어나면 비난은

다른 집단으로 옮겨간다. 하나의 편견을 걷어 내고

나면 그만큼이나 뿌리 깊은 또 다른 이념과 걱정이

드러나곤 한다. 그러한 편견은 종교적 신념에서

나오기도 하고 일탈자나 이방인이 정상적인 삶의

방식을 위협한다는 불안감에서 나오기도 한다.


이러한 타자들은 희생양, 즉 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에 대해 탓을 돌리며 비난하는 표적이 된다.


부당하게 비난받았다는 느낌은 당사자에게 오래도록

상처를 남긴다. 때로는 감정의 상처가 평생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집단 괴롭힘과 따돌림의 피해자

상당수가 이런 후유증을 겪는다.


오늘날에는 집단 괴롭힘이 오프라인뿐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이뤄진다. 온라인에서의 권력

남용도 오프라인에서만큼이나 강력하다.


이러한 권력 남용 현상을 접하다 보면

대관절 가해자는 어떤 사람이며 괴롭히는

동기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권력 남용은 비난 문화가 팽배한 조직에서 만연한다.


비난 문화가 지배하는 조직은 제품의 결함이나

오류, 혹은 그 밖의 어떤 잘못이 발생했을 경우에

하급 관리자나 현장 직원처럼 저항 또는 반박에

나서기 가장 어려운 위치에 놓인 사람에게 

탓을 돌리는 경향이 강하다.


2005년에 발생한 서일본 여객 철도 사고가 그러한

비난 문화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2005년 4월, 만원인 통근 열차가 과속으로 달리다

탈선해서 기관사의 승객 106명이 목숨을 잃었다.


진상 조사 결과, 기관사들을 만성적으로 괴롭히던

비난 문화의 공포가 드러났다.


극도로 빡빡한 운행 일정의 압박 속에서, 열차가 지연되면

기관사가 비난을 뒤집어썼다. 지연이 발생했을 때 기관사가

받게 되는 징계는 가혹했다.


일근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반성문 쓰기

상사 면담이라는 명목의 언어폭력, 굴욕스러운

단순 업무 등의 징벌적 조치가 가해졌다.


당연하게도 기관사들은 실수를 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덮으려 했고 열차 지연을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다.

그날에는 기관사의 필사적인 노력이 참사로 이어졌다.


한편 사회에는 비난 역할을 맡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기업과 정부가 설명 책임을 다하도록 만들려는

개인과 단체들이다. 이들은 권력과 특권의 남용

부패와 비윤리적 행동 등을 찾아내고 드러낸다.


비정부기구(NGO), 규제 당국, 감사인, 주주, 언론,

소셜 미디어, 내부 고발자 등 다양한 사람과

집단이 이에 해당하며, 이들 전체는 사회적 양심을

대표한다. 하지만 이들은 각기 매우 다른 목적과

활동 방식을 보인다. 공격적이고 급진적인 방식을

취하는 곳도 있고 밋밋하고 관료적인

방식을 쓰는 곳도 있다.


이들이 폭로하는 내용 중 당국자의 뇌물 수수,

불법 어획, 의원들의 부당한 경비 처리와 같이

눈길을 끄는 사안은 언론에 기사화 된다.


위키리스크가 미 중앙정보국 기밀문서 수천 건을

공개한 것은 특히 많은 주목을 받았는데 미국 정부가

미국 국민과 외국 정치인들을 불법적으로 감시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설명 책임을 다하라 이것이 비난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모토다.


이들은 역풍을 맞기도 한다.


비난의 대상이 된 기업은 홍보 군단으로 무장하고서

비난에 물타기를 할 수 있다. 비난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이다.


정부는 배신자를 고립시키고 형사 고소를 하는

등의 방법으로 입을 다물게 만들 수 있다.

고위 당국자와 의원들은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한 일이라고 연막을 칠 수 있다.


전임자가 한 일이다,

오해가 있었다,

통계를 잘못 읽었다,


엄밀히 말해 법을 위반한 것은 아니다 등등의

해명을 내놓는 것이다. 물론 이런 방어 전략이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내부 고발의 역사를 보면 골리앗의 반격에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끝내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사례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1970년대 뉴욕 경찰 프랭크 서피코는 경찰의

부패와 뇌물 수수를 내부 고발했다가 몇 년 동안이나

상사와 동료의 조롱과 보복에 시달렸다.


하지만 경찰부패척결위원회에서 서피코의 말이

사실임이 밝혀졌고, 오늘날 서피코는 경찰이

조직 문화를 쇄신하도록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정당한 사유로 비난받았을 때, 그리고 비난받을 

만한다는 것을 본인이 인정했을 때는 사과가

건설적인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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